홍천을 되찾은 용천택과 60인 용천택의 연명 상소문과 재목500조 진상
천년(千年)이 넘은 홍천역사 중에 잃어버린 6년의 홍천이 있었다. 407년 전, 과연 홍천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불편한 역사적 진실은 광해군 일기에서 밝혀졌다. 407년 전, 홍천현(洪川縣)이 6년 동안 역적의 오명으로 폐현(廢縣)돼 춘천에 부속(付屬)된 것.
17세기 초 1613년(광해군5년) 계축옥사(癸丑獄事)의 주동자 중 한사람인 심우영(沈友英)과 그의 아들 심섭(沈燮)이 홍천에 거주하고 그의 처(妻)가 홍천에서 잡혔다는 이유로 법전(法典)에 따라 당시 홍천현감인 안사성(安士誠)이 파직되고 읍호(邑號)가 강등되는데 현(縣)의 아래에 해당하는 읍호가 없어 결국 춘천(春川府)에 합쳐지는 치욕을 맞으며 홍천의 지명이 6년 동안 사라졌다.
그리고 6년 뒤 홍천(洪川)에 사는 품관(品官) 용천택(龍天澤)은 지역인사 들과 함께 연명해 임금(광해군)에게 정장(呈狀)하기를, 심우영의 처(妻)가 본읍(本邑)에서 잡혔다는 것만으로 홍천이 폐현(廢縣)됐는데 심우영은 홍천사람이 아니고 본관이 청송(靑松)이며 거주지가 한성임을 주장하고 억울하게 오명을 뒤집어 쓴 것을 호소하며 당시 재목이 고갈한 때에 500조(條)의 재목을 조정에 바치고 홍천현의 복설(復設)을 요구하게 된다.
홍천현이 폐현(廢縣)되고 다시 복설(復設)되기까지 광해군일기를 통해 살펴본다.
"역적 심우영 등이 거처했던 고을의 수령을 파직하고 그 읍호를 강등하게 하다"
광해군일기[중초본] 66권, 1613년(광해5년) 5월 12일 기사 2번째 기사에서, 의금부가 아뢰기를, "역적 심우영(沈友英)·심섭(沈燮)·박종인(朴宗仁)·서양갑(徐羊甲) 등을 이미 전형(典刑)으로 다루었으니, 법전에 따라 그들이 각각 거처했던 고을의 수령을 파직하고 그 읍호(邑號)를 강등시켜야 할 것입니다. 심우영과 심섭이 당시 홍천(洪川)에 거주했고 서양갑은 당시 여주(驪州)에 거주했으니, 해조로 하여금 예에 따라 거행토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그러나 여주는 선조(先朝) 왕후의 고향이니 읍호를 강등하는 일은 대신과 의논한 다음에 아뢰어라."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대신에게 의논했더니 영의정 기자헌과 좌의정 심희수가 의논드리기를 ‘여주는 선조 왕후의 적향(籍鄕)일 뿐만 아니라 선릉(先陵)이 위치해 있는 지역이니 똑같이 거행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해관(該官)으로 하여금 예전 규례를 상세히 조사하게 한 다음 참작해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의논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義禁府啓曰: "逆賊沈友英、沈燮、朴宗仁、徐羊甲等已正典刑, 依法典各其所居官守令罷職, 降其邑號。 沈友英、沈燮時居洪川, 徐羊甲則時居驪州, 令該曹依例擧行何如?" 傳曰: "允。 驪州先朝王后之鄕, 降號事, 議大臣以啓。" 義禁府啓曰: "議于大臣, 則領議政、左議政, 奇自獻、沈喜壽議: ‘驪州非但先朝王后籍鄕, 又是先陵所在之地, 似難一樣擧行。 令該官詳査舊例, 酌處爲當。" 傳曰: "依議。"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32책 175면
홍천현지(洪川縣誌/花山縣誌)에서 현감목록인 선생안(先生案)을 살펴보면 당시 홍천 폐현(廢縣)에 대해 임금과 논의한 좌의정은 심희수(沈喜壽)인데 심희수는 32년 전 홍천현감을 지냈던 인물이다. 그리고 심희수가 역적 심우영(沈友英)의 6촌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심희수는 파직당하지 않고 70가까운 노구에도 국문에 참여했다. 당시 홍천현감에서 파직된 수령은 안사성(安士誠) 현감으로 1611년 7월12일 부임해 1613년 5월5일에 파직(罷職)당했다.
"6년 뒤, 영건 도감이 홍천 폐현에서 재목을 바치고 본현의 설치를 요구한다고 아뢰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37권, 1619년(광해11년) 2월 11일 을축 7번째 기사에서는, 영건 도감이 아뢰기를,
"강원도 홍천(洪川)에 사는 품관(品官) 용천택(龍天澤) 등 60여 명이 연명하여 정장(呈狀)하기를 ‘역적 심우영(沈友英)은 본래 홍천 사람이 아닌데, 그의 처가 본읍(本邑)에서 잡히는 바람에 폐현(廢縣)이 되어 백리밖에 안 되는 춘천(春川)에 부용이 되고 말았습니다. 억울하게 오명을 뒤집어썼으나 억울함을 풀길이 없습니다. 재목 5백 조(條)를 도감에 바치고자 하니 본현을 다시 설치하여 지극한 원통을 풀어 주소서.’ 하였습니다. 심적(沈賊)은 과연 홍천 사람이 아니었는데, 우연히 잠시 동안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현을 폐하여 춘천에 부속시킨 지 이미 6, 7년이 지났으니,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한 것은 지극한 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재목이 고갈된 때에 5백조의 재목은 적지 않은 보탬이 될 것이나, 다만 역적사건에 관계된 일이므로 성상께서 결정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營建都監啓曰: "江原道 洪川居品官龍天澤等六十餘人, 連名呈狀曰逆: ‘賊沈友英本非洪川之人, 其妻被拿于本邑, 因作廢縣, 附庸於春川百里之地。 橫被惡名, 無路伸冤。 願納材木五百條于都監, 還設本縣, 以伸至痛。’ 云。 沈賊果非洪川之人, 而偶因一時寄留之故, 廢屬春川, 已過六七年之久, 民之號冤, 出於至情。 當此材木竭乏之時, 五百條之材木, 所補不細。 第惟係干逆獄, 唯在聖斷。" 傳曰: "依(所)啓(施行)。" 【태백산사고본】 49책 49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33책 209면
"이조에 전교하여 홍천을 다시 설치하라고 전교하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37권, 1619년(광해11년) 2월 11일 을축 8번째 기사는, 이조가 아뢰기를, "홍천은 애당초 역적의 본적지가 아니었으니, 강등하여 현을 폐한 것은 진실로 억울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미 역적의 고을로서 법전에 따라 폐하여 역적을 토벌하는 대의를 밝혔고 보면, 한때 자원하여 재목을 바친다고 해서 갑자기 개설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이 일은 도감에게 계하한 공사이므로 의논드리기 곤란한 듯하나,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보면 극히 미안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정말 역적의 고을이라면 어찌 재목을 바친다고 하여 다시 설치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고을은 실로 심적(沈賊)이 살았던 땅이 아니니 다시 설치한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였다.
○吏曹啓曰: "洪川初非逆賊元屬之鄕, 則降爲廢縣, 誠爲冤悶。 旣以逆鄕, 依法典廢革, 以明討逆之大義, 則因一時材木願納之故, 遽爲改設, 未知如何。 此係都監啓下公事, 似難容議, 而揆諸事體, 極爲未安。 (敢啓。)" 傳曰: "果是逆鄕, 則豈可以納材事, 復設乎? 此邑實非沈賊所居之地, 復設何妨?“ 【태백산사고본】 49책 49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33책 209면
홍천현이 다시 복현된 것은 1619년 4월 8일 황집(黃潗)이 홍천현감으로 부임하면서이다. 복현 후 첫 현감이었던 황집은 1619년 9월 7일 부친상을 당해 자리에서 물러나고 이어 김광환(金光煥)이 부임한다.
용천택(龍天澤)
용천택은 홍천용씨 시조이며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을 총지휘한 용득의(龍得義:고종28년 영삼대사 문화시중)의 16세손(順雨公派)이다.
용천택(龍天澤)은 조선 제14대 선조(宣祖)때 품계는 통훈대부이며 황해도 평산부사(通訓大夫 行 平山府使)를 역임했다. 자(子)는 경택(景澤)으로 병인년(1566년)에 태어나 갑자년(1624년) 7월20일 58세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丙寅 生. 甲子 七月二十日 卒) 생전의 이름(本諱)은 천택(天澤)이다.
용천택이 고향인 홍천으로 낙향해 계축옥사와 관련해 홍천현이 역적도시로 폐현되는 수모를 겪게 된 때는 47세 때 일이었다. ‘因革邑 遞去’ 혁읍(革邑)은 역적이나 강상죄인이 나온 고을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체거(遞去)는 벼슬을 내어 놓고 물러나는 것이다. 계축옥사에 연루된 심우영과 그의 아들 심섭으로 인해 당시 안사성 홍천현감은 파직당하고 홍천은 6년간 폐현됐다.
407년 전, 역적도시로 억울한 오명으로 폐현된 홍천현이 다시 복설(復設)되기까지, 당시 홍천의 품관(品官) 용천택(龍天澤)과 지역주민 60여명은 요즘말로 홍천의 오피니언 리더들이다. 잃어버린 홍천, 위기의 홍천을 다시 회복하기위해 사회지도층이 한마음으로 앞장선 사례는 작금의 지방소멸로 위기를 겪는 홍천군에 귀감이 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용석준 홍천뉴스투데이 편집장
참고문헌: 광해군 일기 조선왕조실록 화산현지(홍천현지) 홍천용씨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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