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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책] 여뀌꽃 떨기 속의 백로... 고정 관념을 깬다는 것

용석준 기자 | 기사입력 2023/12/03 [17:53]

[고전산책] 여뀌꽃 떨기 속의 백로... 고정 관념을 깬다는 것

용석준 기자 | 입력 : 2023/12/03 [17:53]



여뀌꽃 떨기 속의 백로

 

앞 여울에 물고기 하도 많아서
마음먹고 물결 가르며 날아들려다
사람 보고 별안간에 너무 놀라서
여뀌 핀 언덕으로 되려 날아와
목 뺀 채로 사람 가길 기다리느라
가랑비에 털옷은 자꾸 젖지만
마음 외려 여울 고기 그대로인데
사람들은 욕심 잊고 서 있다 하네.

 

前灘富魚蝦전탄부어하
有意劈波入유의벽파입
見人忽驚起견인홀경기
蓼岸還飛集요안환비집
翹頸待人歸교경대인귀
細雨毛衣濕세우모의습
心猶在灘魚심유재탄어
人導忘機立인도망기립

 

이규보(李奎報, 1168~1241), 『동국이상국집전집(東國李相國全集)』 제2권, 「고율시(古律詩)」. <방장 월사의 그림 족자를 읊은 2수[月師方丈畫簇二詠]> 중 제2수 <여뀌꽃 떨기 속의 백로[蓼花白鷺]>

 

 

해설

 

사람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변하지 않는 굳은 생각이나 무엇인가에 대해 당연하다고 알려진 생각을 고정 관념이라고 하는데, 고정 관념은 종종 우리의 판단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고정 관념은 경우에 따라 그 관념을 공유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과 행동을 하나의 방향으로 이끄는 긍정적인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고정 관념의 대상에 대해 긍정적 혹은 부정적 선입견을 주입하여 대상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어렵게 만든다.

 

“고정 관념은 다양한 역사적·종교적·문화적 연원을 바탕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고정 관념이 형성된 이유와 과정을 일률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현재 우리에게는 다양한 고정 관념이 존재하고, 우리 대부분이 그 고정 관념에 영향을 받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가만히 돌이켜보면 엄청난 번식력과 배설물로 인해 유해 동물로 인식되기 전까지 비둘기가 평화·조화·사랑·자유·낭만·희망 등을 상징하는 동물로 인식되었던 것처럼, 어떤 대상에 대해 긍정적인 고정 관념을 부여한 것도 우리 스스로이고 부정적인 고정 관념을 부여한 것도 우리 스스로인데 우리는 그 고정 관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관념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처럼, 고정 관념 역시 그것을 실체적 진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니 진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도된 왜곡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고정 관념에 지배받고 있다. 까마귀가 정말 죽음·악몽·불길함·사악함과 관련 있고, 백로가 정말 순수하고 우아하며 순결하고 고귀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 보이는데, 그런데도 사람들은 백로를 보면 좋아하고 까마귀를 보면 눈을 피한다. 고정 관념의 벽을 넘기가 그만큼 어렵다. 그 벽은 부수고 허물어야 하지만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한다. 과거부터 살펴봐도 그럴 수 있었던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이 시를 지은 이규보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 제목으로 볼 때 이 시는 스님의 방 안에 있는 족자의 그림을 보고 쓴 제화시이고, 시로 볼 때 족자에 그려진 그림은 여뀌꽃 떨기 속에 서 있는 백로 몇 마리뿐이다. 흔히 볼 수 있는 동양화를 떠올려 보면 앞 여울과 여울 속의 물고기, 지나가는 사람, 언덕은 모두 그림 속에 그려진 풍경이 아니라 그림을 보고 시상을 떠올린 이규보가 만들어 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여뀌꽃 사이에 서 있는 백로 몇 마리가 그려진 그림을 보고 시상을 끌어내고 구상하여 한 편의 시로 만든 능력이 이규보를 시인으로 만들었다면, 세상 사람 대부분이 “욕심 잊고 서 있다.”고 생각하는 백로를, “마음을 외려 여울의 물고기에 두면서도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 목을 길게 뺀 채 비를 맞으며 사람이 되돌아가기를 기다리는” 탐욕과 가식에 가득한 존재로 만든 능력은 이규보를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천재로 만든다,

 

이 시가 여뀌꽃 사이에 서 있는 백로 몇 마리를 그린 그림이라는 정태적인 화면에 입체적인 공간을 부여하고 시간의 흐름을 더하여, 정태적인 화면을 생동감 넘치는 동태적인 사건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시적으로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 시의 가장 뛰어난 점은 김종직이 『청구풍아』에서 “이 시는 탐욕스러운 자가 청렴한 듯이 사는 것을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니 풍자의 뜻이 담겨 있다[此所謂貪夫若廉, 而人不知也, 寓諷意].”고 한 것처럼, 그동안 순수·우아·순결·고귀한 존재로 인식되었던 백로를 탐욕에 가득한 가식적인 존재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다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애초에 백로는 탈속적인 고귀하고 순결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깃털이 희고 목과 다리가 긴 새일 뿐이다. 해안이나 습지에 서식하며, 물고기·개구리·곤충·뱀 등을 잡아먹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흔한 새이다. 백로가 앞 여울의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은 탐욕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고, 사람이 가기를 기다리는 것은 가식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백로를 순결하고 고귀한 존재로 단정하는 것만큼이나 탐욕에 가득한 가식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것도 잘못된 것 아닐까. 이규보가 천재인 것은 분명해 보이고 시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하지만, 왠지 그가 벗어난 고정 관념이 새로운 고정 관념을 이끄는 듯이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윤재환 

단국대학교 국어구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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