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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동해바다, 양양 낙산사의 매력 속으로

꿈이 이루어지는 절, 낙산사 기행문

박익희 기자 | 기사입력 2015/08/04 [15:53]

푸른 동해바다, 양양 낙산사의 매력 속으로

꿈이 이루어지는 절, 낙산사 기행문

박익희 기자 | 입력 : 2015/08/04 [15:53]

누구나 소중한 추억이 있게 마련이다.  빼어난 풍광과 역사문화유적지로 알려진 양양의 낙산사는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중.고등학교 수학여행의 필수 코스였다.

 

▲ 홍련암의 새벽, 주말이면 철야기도를 한다.     ©박익희 기자

 

또한 낙산사 홍련암에는 신비한 파랑새의 전설이 전해져온다. 지금도 파랑새가 살고 있는 홍련암은 구법를 위해 당나라로 떠났던 의상이 돌아와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곳으로 유명하다.  파랑새가 깨달음으로 인도했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5년 전 이맘 때 경기데일리 논설위원이고 십팔기보존회 신성대 회장이 양양 낙산사로 같이 가자고 권유해 왔다. 사연인 즉 미국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고 있는 권재범 관장이 조선의 국기 ‘십팔기’를 배우기 위해서 수련지망생 10여 명을 데리고 낙산사를 찾아왔는데 1주일간의 집중 수련기간을 끝내고 무예수련생들을 실력을 심사하러 간다고 했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본인은 무조건 좋다고 했었다. 때마침 시간도 있고 여름철 피서를 가는 기분으로 동행했었다. 미국에서 온 교포와 백인과 흑인들은 낯선 무예에 대하여 진지하게 배우고 습득을 했다.
 
2010년 이맘때 낙산사에 도착하여 바라본 낙산사 주변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2005년 식목일 어느 운전사가 버린 담배꽁초에 낙산사는 홍련암과 보타전만 남긴 채 화마가 삼켜버렸다.   불길 속으로 사라지는 소중한 문화재를 TV로  볼 때 그 충격과 상실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애정이 크면 클수록 잃어버린 아픔은 크게 마련이다.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불타고 원통보전과 동종은 엄청난 불길에 사라졌다.
 
지난 7월 10일 찾은 낙산사의 출입구는 자동차가 생활의 필수품으로 정착되면서 이제 많이 변해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안내 현수막에 따라 오르는데 “꿈이 시작되는 길”이라고 안내간판이 세워져있다. 아! 내 꿈은 무엇인가? 내가 여태 추구한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서각사각 거리는 마사토가 갈린 소나무 숲길을 따라 걸으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예전의 낙산유스호텔은 지금은 낙산사 신도와 손님을 위한 인월요(印月堯)로 이름이 바뀌었다. 인월요에서 정해주는 방에 여장을 풀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리워한 동해바다를 보기 위해서 의상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낙산사 의상대     ©박익희 기자


3년 전보다 낙산사 주변에는 온갖 꽃씨를 심어서 철따라 다양한 꽃들이 피어나 아름다움과 신비를 더한다. 자연경관이 빼어난 천하명당의 관음성지는 금상첨화가 되고 있었다. 화마가 삼킨 큰 상처도 엄청난 노력과 정성으로 차츰 지워지고 있었다. 
 
달리는 차창 밖에 비친 소양강과 상류 내린천은 그냥 바닥을 드러내고 목말라 하고 있었다. 산은 여전히 푸른데 예년 강수량의 1/3도 미달하니 농경지는 타들어가고 심각한 가뭄의 피해를 노출시키고 있었다. 지금 대지는 목이 마르다. 그래서 애가 탄다.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 기우제라도 지내며 인간이 만든 생명체들이 시들어가는 참극을 달래야 할 것 같았다.
 
한국의 숲으로 선정된 장수대에도 바짝 마른 계곡에 허연 강돌들이 강한 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푸른 숲이 있어 숲에 기댈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일행은 도랑물처럼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위안을 삼았다. 나는 신발조차 벗지 않았다. 하늘이여 비를 주소서! 라고 기원했다.
 
듣도 보도 못한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가 침입하여 온 나라를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무서운 열기는 냄비처럼 달아올라 나라 경제가 마비되고  거리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뚝 끊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메르스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지독한 가뭄이었다. 이러다간 수도권에도 제한급수를 시작할런지 모르겠다고 내심 두려움에 불안했다.
 
잘 익은 산딸기를 한 웅큼 따서 먹으며 가뭄의 공포를 달랬다. 한계령 앞 점봉산에는 운무가 걸쳐있었다. 멋진 풍광 앞에 저마다 소지한 스마트폰으로 이런 장면을 놓칠세라 사진으로 담았다.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단체 사진을 찍었다. 
 

▲ 한계령 휴게소에서 바라 본 점봉산 운해     ©박익희 기자


무더위에는 아이스크림이 제일인데 한계령에서 먹는 아이스크림은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1975년 한계령을 처음 찾았을 때는 군인들이 산을 깍아 길을 내고 비포장 상태로 여름에 수확한 감자를 담은 포대가 급경사 길을 오르며 버스 안에서 이쪽저쪽으로 쏠리고 사람들의 몸도 심하게 흔들거렸고,  버스도 간신히 넘나들던 한계령이 아닌가. 
  
우리 일행이 탄 자동차는 이제 눈부신 기술의 발전으로 가뿐하게 해발 920m 한계령을 넘나든다. 한 밤중에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는 등산객들을 이곳 한게령 휴게소에 풀어놓으면 이마에 불빛을 달고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설악산 대청봉 등산의 출발점이다.
 
한계령을 넘어왔지만 여전히 계곡에 물은 귀했다. 더 좋은 자연을 찾아서 살아보겠다는 인간의 욕망은 수려한 자연에 상처를 내었다. 괴력의 포크레인 삽날에 곳곳에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섰고 지금도 여러 건설현장이 보였다. 자연훼손에 마음이 저려왔다.
 
다시 낙산사 경내로 돌아간다. 푸른 동해바다 절벽위에 서 있는 의상대는 여전하건만 의상대 옆의 관음송의 생육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 한쪽에 푸른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관음송아! 너는 알 것이다. 2005년 식목일날 불타는 낙산사를 보면서 얼마나 울었을까. 철석이는 파도 소리에 너는 얼마나 마음을 닦았겠느냐. 그래서 너의 이름이 관음송(觀音松)이 아니냐?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의 울음과 절망감도 보았다는 관음송이였지. 너도 다시 꼭 살아나다오, 포대기에 단 약물을 먹고 제발 건강하게 옛 모습을 보여다오. 

 
내가 없는 의상대는 앙꼬 없는 찐빵이지 않겠느냐. 낙산사 주변에는 해당화는 끝물이었지만 열매는 마치 주황색 유리구슬처럼 탐스럽게 달렸다. 해당화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았다.

 

▲ 새벽의 의상대     ©박익희 기자

 

수많은 시인묵객과 관광객들이 의상대를 배경으로 시를 쓰고 사진을 담아갔으며 이곳에서 동해바다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아침 해를 보면서 삶의 환희와 새 삶을 불태울 각오를 다졌을 이곳에 오면 가슴이 그냥 뻥 뚫린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심호흡을 하며 두 팔을 벌리게 된다.
 
정치인의 당리당략 아귀다툼과 아수라장이 된 세상의 권력자, 재력가들의 암투와 전쟁, 국민을 우습게 아는 권력자들의 한심스러운 작태도 그만 다 잊게 만든다. 그래서 이곳은 누구나 순수한 자신을 만나고 새 출발의 각오를 다지는 곳이다.
 
한마디로 너무 좋은 곳이다. “아, 너무 좋다” 이다. 이말 외에 뭐가 필요하랴. 
 
이곳에서 듣는 홍련암의 예불소리는 671년에 의상대사가 발원했던 그대로이다. 오늘도 푸른 지붕의 홍련암에는 많은 불자와 관광객은 대자연이 선사한 경관 앞에 푸른 희망을 발원하며 두손을 겸허하게 모으게 만든다.
 
원효가 의상이 물 없는 이곳에서 구도를 하고 있음을 걱정하여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설악산 기슭 영혈사의 물을 끌어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팡이를 꽂은 곳에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 나왔다. 지금 이곳에는 아름다운 조형물 약사여래불에서 쉼 없이 생명수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도 그 달디 단 감로수에 목을 축이고 손을 씻고 두 손을 모은다. 나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바람 앞에 등불이 된 나라의 안녕을 위해서, 나라의 경제를 위해서, 간사한 일본을 이기는 위해서, 부국강병, 자주국방을 위해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비가 내리게 기원했다.
 

▲ 낙산사 홈페이지에서 퍼온 홍련암과 의상대     ©경기데일리


홍련암 주변에는 수국도 파랗게 피어있다. 낙산사는 온통 파란색이 넘쳐나는 절이다. 파랑은 희망이다. 지붕도, 꽃 색깔도, 나무들도 짙푸른 녹음이고 바다는 파랗다 못해 짙푸르다.
 
동해바다 홍련암 대숲에는 많은 새들이 지지배배 들락날락 하였다. 파랑새를 찾았지만 이번에는 안보였다. 3년 전 친구랑 같이 왔을 때에 보았던 장소에서 한참 동안 파랑새를 찾았지만 안보였다. “아침에 와야 만날 수 있다”고 홍련암 보살님이 살짝 귀띔을 한다. 나는 홍련암을 돌아나오면서 괜히 처마끝에 달린 풍경 속 물고기를 툭 건드려 댕그랑 소리를 내어본다. “내일 새벽에 다시 올 거야”라고 다짐한다.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와 낙산사 해변으로 향했다. 십팔기보존회 신성대회장, 박금수 사무총장, 다른 사범들과 예약된 식당에 도착하니 미국 뉴저지주에서 온 고재범 관장, 사업가 이민재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 관장이 "다시 만나 반갑다"며 인사를 했다.
 
이국 땅 미국에서도 우리나라의 무예 ‘십팔기’를 배우기 위해서 온다는 고 관장이 커 보이고 존경심이 생겼다. 고 관장은 “1년에 한번 오는 낙산사 십팔기 수련회가 가장 중요한 행사라며 1주일 간 이곳에 머무르면 내 꿈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고 말했다.   신성대 회장, 박금수 교수, 박권모 부회장, 십팔기 사범에게 깍듯한 예를 갖춘다. 지켜보는 필자도 저절로 예의범절과 무예세계의 기율을 보는 것 같아 감격스럽다.
 
고재범 관장은 미국 뉴저지주에서 태권도 도장 2개를 운영하며 선배들이 태권도로 대한민국을 알렸듯이 태권도와 십팔기를 알리겠다는 말에 든든함과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이민재씨는 아들과 함께  십팔기 수련회에 참가했다.  그는 미국에서 패션업체 ‘mia’를 경영하는 ceo였다. 중국에서 생산하고 미국에서 판매를 하는 시스템으로 낙산사는 처음 왔다며 이곳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있었다. 나도 이제라도 십팔기 중에 몇 가지는 배워야겠다. 십팔기사범들이 연마하는 비전되는 도가양생술과 봉술은 꼭 익혀야겠다고 다짐했다. 
 

▲ 낙산해수욕장 전경     ©박익희 기자


여름이면 동해바다 해변은 해송과 함께 멋진 해수욕장으로 변신한다. 지난 7월 9일 개장한 낙산해수욕장은 넓은 모래사장과 아름다운 낙산사가 있어 인기 있는 해수욕장 이다.
 
하지만 낙산해수욕장에도 아픈 역사가 묻혀있다. 6.25동란 때 많은 인민군과 국군의 시체를 화장했던 곳이다. 이 사실을 김익동 경북대학교 전 총장은 증언한 바 있다. 낙산사 무문스님은 구천에 떠돌고 있는 이들의 영혼을 위해서 천도제를 지내주었다고 말했다.
 
다음날 새벽 4시에 저절로 잠에서 깨어났다. 일행들의 잠을 깨울까 봐서 살며시 문을 열고 나왔다.
 
어둠이 채가시지 않아 하늘은 새벽의 신선한 기운으로 넘치고 있었다. 인월요에서 홍예문을 지나 예불소리 들리는 보타전, 지장전을 지나 나는 의상대를 찾았다. 꿈이 이루어지는 낙산사에서 나의 꿈을 발원하고 소원성취를 기원하기 위해서 나는 마음을 모았다. 밤새 철야기도를 하는 홍련암의 좁은 법당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푸른 홍련암 지붕, 목탁소리와 함께 들리는 독경소리가 희망을 부르고 아침을 부른다. 해무를 머금은 해당화와 수국, 다른 꽃들도 본래 그대로 색깔과 향기를 지닌 자태로 신성한 새벽을 맞고 있다.
 

▲ 낙산사 홈페이지 갤러리 사진에서 퍼온 야간 낙산사 전경     ©경기데일리


밤새 해안가를 지킨 초병 5명이 홍련암 위쪽 초소로 지친 몸을 이끌고 자취를 감춘다. 우리들이 편안한 밤을 보내도록 군인들은 나라 지키는 일에 젊음과 신명을 바치고 있었다. 군인들이 고맙다.  군인은 나라를 지키고 민간인은 생업에 충실하면 된다.
 
나는 신새벽에 왠지 충만감을 느꼈다. 아니 충만감이 저절로 차올랐다. 보타전 오른편으로 나 있는 길을 걸으며 해수관음상을 맞으러 한 걸음 한 걸음 발길을 옮겼다. 그래 일출을 못 보면 어떠냐. 해는 구름 속에서도 여전히 떠오를 거야라고 자위를 했다. 
 
해태 사자상이 지키는 계단을 오르니 엄청난 크기의 해수관음상을 나홀로 친견하는 감격을 누렸다. 조금 있으니 몇몇 사람이 경건하게 절을 하고 관음상 주위를 합장하며 순례를 했다. 나도 손을 모으고 천천히 몇 바퀴 돌았다.
 
낙산사 본절로 돌아오는 길은 보탑사 위쪽으로 꼬마 석등이 앙증맞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세웠는데 작은 강돌을 주워서 석등 위에도 쌓았고 길가에도 쌓았다. 아직도 이곳에는 금계국이 한창이고 금국도 보이고, 원추리, 나리꽃, 도라지꽃, 초롱꽃, 성질 급한 코스모스도 피어있다. 매리골드도 보인다.
 

▲ 해수관음상을 보고 낙산사 원통보전으로 오늘 길에는 작은 돌로 돌탑을 앙증맞게 쌓아두었다,     © 박익희 기자


씨를 뿌리고 가꾸면 자연은 씨 뿌린 그대로 결실을 맺어 보답한다. 사랑으로 정성으로 크는 게 세상의 이치이고 우리의 꿈도 소망하는 데로 열심히 노력하면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우리의 마음에도, 가족의 마음에도, 공동체에도 사랑의 씨를 뿌리고 가꾸면 우리 사회가 우리나라가 맑고 밝게 향기로워진다. 온 세상이 환해진다. 부처님 그게 맞지요. 부처님이 가르쳐준 팔정도(八正道)의 삶을 살면 사람들도 부처가 되고, 세상은 불국토가 되어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이 되는 거지요.
 
원통보전에도 스님이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멋진 담장이 둘러쳐진 원통보전의 현판글씨는 삐뚤삐뚤한데 볼수록 정겹다.  누가 쓴 것일까를 살펴보니 경봉스님 글씨이다. 경봉스님은 어떤 분일까?
 
칠층석탑의 아름다운 모서리는 끝부분을 살짝 들어 올려져 석공의 미적 감각이 훌륭했다. 석탑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경쾌하게 했다. 들어올 때 보니 석탑이 많이 깨어졌는데 다른 한쪽에서 보니 거의 온전하게 보여 다시 사진으로 담았다. 석탑 모서리 마냥 대나무 울타리도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어떤 분인지 모르지만 뛰어난 미적 감각을 가진 분임이 틀림없다. 
 

▲ 아름다운 담장이 원통보전과 칠층석탑을 소중하게 보듬고 있는 것 같았다.     ©박익희 기자

인월요로 돌아가는 길에는 십팔기 수련생들이 일찍 일어나 고 관장의 구령에 따라 몸을 풀고 맨손 체조를 한다. 시계를 보니 6시 10분이다. 수련생들은 매일 아침 규칙적인 생활규율로 심신을 단련하고 십팔기를 집중 수련했다.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다.
 
이들은 해수관음상을 향해 한달음에 뜀박질을 한다. 나도 기자 본능을 살려 육중한 몸을 망각한 채 내달렸다. 해수관음상도 이들의 한결같은 훈련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나는 해무를 안은 해수관음상 앞에 수련생을 불러 모아 귀한 단체사진을 찍었다. 다시 그들은 한달음에 내달려서 공양간에서 아침공양을 했다. 그 후에는  인월요 비선무 도장에서 오늘 심사를 받기위해서 그동안 배운 십팔기 무예 동작을 점검했다.
 
공양간 앞길에 핀 흰 장미가 아직도 5월을 느끼게 했다. 이미 매발톱은 졌지만 꽃씨를 달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꽃씨 몇 개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내가 전해주는 꽃씨는 행복바이러스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사하리라 믿는다.
 
십팔기 심사는 10시 경에 시작됐다. 규정과 격식에 의해 따라 진행되었는데 ‘충의(忠義)’라는 인사구호와 함께 한국어로로 시작되었다. 영어통역은 기업가인 이민재씨가 통역을 했다.
 
충의라면 나라에 충성을 하겠다는 뜻이다. 십팔기는 국가의 무예임으로 지극히 당연한 구호라 생각되었다. 충(忠)자와 의(義)자를 파자로 풀어보면 마음에 중심이 있어서 내가 임금을 위한 초병이 되는 글자임으로 왕명으로 만든 조선의 국기로 충의(忠義)는 멋진 구호로 생각되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참가하는 태권도 2단인 일리스(54, 여)씨는 “태권도와 십팔기를 배우며 한국을 사랑하게 되었고, 18가지 병장기를 다루며 정신과 육체가 건강해졌다” 며 낙산사의 아름다운 풍광에 뷰티불과 어메이징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겨 세웠다. 
  
이민재씨는 “조선의 국기인 십팔기를 배우며 한국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고 말하며 “한국의 역사문화에 큰 관심이 갖게 되었다. 시간이 허락되면 내년에도 참가하겠다” 고 말했다. 그는 한국인으로 역사와 문화, 이런 무예가 있음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 미국에서 온 십팔기 수련생들의 단체 사진     ©박익희 기자


특히 고재범 관장은 “나라의 국기인 십팔기를 나라에서 계승해야지. 왜 개인들이 보존을 위해서 힘쓰는지 모르겠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 믿는다.
 
아무튼 심사가 끝나고 일행이 서울로 가서 궁궐과 레포츠시설 체험 관광을 위해서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버스에 타고 돌아갔다.
 
이렇게 멋진 곳을 하루 밤만 자고 돌아가야 하는 일정이 못내 아쉬웠다. 십팔기 심사에 참가한 무문 스님께 하루 밤을 더 머물고 싶은데 가능하냐고 속내를 내비쳤다. 스님께서는 한마디로 그렇게 하시라고 허락을 했다. 무문스님은 서울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십팔기를 배웠으며 십팔기의 고수이다.

 

일행이 돌아가고 난 후 나는 솔밭과 낙산해변, 다시 낙산사 경내를 찬찬히 관찰하고 마음속에 담았다.
 
이곳 오봉산은 바다를 남북으로 바라다 볼 수 있는 돌출된 지형인 ‘곶’으로 풍광이 빼어난 절경이고 토성으로 군사요새로 짐작되었다. 홍예문으로 이어지는 토성이 보루로서 천혜의 요새로 손색이 없었다. 실제로 해수관음상에서 보면 위로는 북쪽 해변을 남으로는 낙산 해변을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군인들이 숲속에서 적의 침입을 경계하고 지키는 군사요새였다.

 

▲ 공중사리탑이 해수관음상 앞 언덕에 자리잡고 있엇다. 이곳에서 바라본 풍광이 아름답다.     ©박익희 기자


홀로 경내를 산책하다가 낙산사의 공중사리탑을 처음 보았다. 매표소 입장권에 새겨진 공중사리탑이 호젓하게 당당하게 서있다. 기록에 남아있는 사리탑이 어디 있는지를 몰랐지만 2005년 불이 났을 때 수목이 불탄자리에 돌탑이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파보니 거기에는 의상스님이 공중에서 떨어지는 부처님의 사리와 수정염주가 승탑 속에서 나와 보물로 지정되었다. 보물인 동종은 녹아서 사라졌지만 보물인 공중사리탑이 다시 생겼으니... 이런 묘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숙소인 인월요로 돌아와 곤한 오수를 즐겼다. 낙산사에 대하여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하니 내 손안에 세상의 모든 정보가 다 있음에 새삼 놀란다.

 

산성 전문가에게 이곳이 토성이 맞는지를 확인하고, 해수관음상에 새겨진 박찬봉 석공에게 전화로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새겨진 이유를 물어보았다. 박정희대통령 내외는 나라의 안녕과 국가발전을 위해 시주를 많이 했다고 전해왔다.
 
영남불교문화연구원의 김재원 박사에게 지난 5월 건봉사, 백담사. 낙산사, 건봉사 등 삼국유사답사때 왔으면 좋았을 걸 때늦은 후회를 했다.

 

낙산사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동란 등 큰 전쟁에 피해를 다 겪은 사찰이라 증언을 했으며 그대마다 이곳은 다시 중건을 했다고 한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것은 오롯이 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흔적과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
 

▲ 아침 햇살을 받은 해수관음상의 아름다운 모습     ©박익희 기자


어서 빨리 동강난 나라가 통일이 되어 부산에서 울산 구룡포를 가쳐 관동팔경을 다 보고 금강산,  칠보산, 원산, 두만강까지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들처럼 통일한국을 맞이 하고 싶다. 부족한 졸필을 남기고 내려놓는다. 이제 방하착이다.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렸다. 새벽에 마침내 기다리던 단비가 내렸다. 
  
 
단비
 
아 이런
비가 온다.
 
오 감사!
마침내 비가 옵니다.
 
매말랐던 산천을 적시는 반가운 비가 내립니다.
동해 일출이야 내일도 뜨겠지만...
 
목마른 대지와
생명체에 생명수가 내립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단비가 옵니다.
 
낙산사 인월요
창문을 열게하는 비가 옵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홍련암에서 두손 모았던
제 소원을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빗소리에
생기가 돋습니다
 
해수관음보살님! 감사합니다.
빈일루(賓日樓)는
오늘은 빈우루(賓雨樓)가 되어도 괜찮습니다.
 
오! 비여
 
새벽예불 목탁소리
적요를 깨우고
스님의 독경소리 청아합니다.
 
내 마음도
평온해집니다.
 
세상의 근심 잠재우소서
안민호국 하게 도와주소서.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석가모니불.
 
똑도르 똑도르르 똑.

 

▲ 사천왕문 앞의 아름드리 소나무 군락, 그 사이로 푸른 동해바다가 보인다.     ©박익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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