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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생가 조감도에 담긴 이런저런 이야기

조종안 | 기사입력 2016/11/01 [17:07]

고은 생가 조감도에 담긴 이런저런 이야기

조종안 | 입력 : 2016/11/01 [17:07]

 

 

▲ 고은 시인. 고향집 방공호 앞에서     © 이복웅

 

 

[신문고뉴스] 조종안 기자 = 영원한 청년시인 고은(84). 그는 1933년 8월 1일 전북 옥구군 미면 미룡리 용둔마을(군산시 미룡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미룡리는 군산에서 4km 남짓 떨어진 두메 마을이었다. 땅이 비옥하고 물이 넉넉한 고을(沃溝)의 쌀 미(米)가 들어가는 면(米面)과 리(米龍里)에 살면서도 쌀밥 구경은 설날과 추석, 제삿날 혹은 잔칫날에만 가능했다 한다.


용둔마을 사람들은 밤이면 석유 등잔도 없어 작은 접시에 어유(魚油)나 식물 기름을 부어 그것에 심지를 적셔 불을 밝혔다. 고은의 어린 시절은 쑥에다 대고 부싯돌을 치는 일과 성냥을 그어대는 일이 교차하던 시대였다. 개화기 이후 접시 등불이 없어지고 석유 등잔이 등장했다가 태평양전쟁(1941~1945)으로 석유가 귀해지자 접시 불빛이 되살아났던 것.


광복 이후 생가 모습으로 추정
 

 

▲ 고은 시인이 직접 그린 생가 조감도     © 이복웅

 


고은 시인의 생가 조감도다. 본인이 직접 그렸다고 한다. 비록 그림이지만 처음 보는 생가여서 흥미를 끈다. 지난 2000년 11월 21일 고은 시인 부부가 이복웅 군산역사문화원장에게 팩스로 보낸 것을 기자가 찍었다. 조감도는 군산문화원이 군산 개항 100주년(1999) 기념행사에 맞춰 고은 문학관(기념관) 건립을 추진했을 때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팩스를 보낸 사람의 영문 이름(KO UN & SANG WHA LEE:고은 & 이상화)이 눈길을 끌었다. 두 사람은 1983년 5월 비밀리에 결혼한 것으로 알려진다. 금실이 좋기로 소문났지만, 팩스도 부부 이름으로 보내다니 놀라웠다. 하긴 나이 일흔아홉에 첫사랑 시집(<상화 시편>)을 내고, 아내는 나의 헌법이자 유토피아이라고 치켜세우는 시인이니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지만.


생가 본채는 부엌, 큰방, 작은방, 구석방에 바깥 아궁이가 딸린 전통 시골농가 모습이다. 사랑채는 끝방, 윗방, 큰방, 부엌, 외양간 등으로 이뤄졌다. 본채 뒤쪽은 대밭이다. 대밭 왼쪽 아래엔 감나무, 오른쪽에 방공호가 있다. 마루와 토방, 두 개의 굴뚝, 본채와 멀리 떨어진 뒷간, 사랑채 뒤편의 남새밭도 보인다. 무척 세밀하고 입체적이다. 정성도 엿보인다.


본채와 사랑채가 ㄱ자 모양으로 들어서 있다. 이는 광복 후 모습을 그리지 않았나 싶다. 고은 시인의 유년기는 앞에서도 언급했듯 쌀밥은커녕 만주에서 들여온 썩은 옥수수나 깻묵조차 먹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다. 영양실조에 걸려 허덕였고, 밤하늘의 별들이 먹을 것으로 보였을 정도였으니 소가 없었을 터인데 외양간이 번듯하게 그려져 있어서다.


"해방 뒤 우리 집의 운세는 좀 나아졌다. 소와 쟁기 그리고 네 바퀴가 달린 달구지를 사들였고, 2, 3년 동안의 머슴까지 두어야 할 정도로 논이 늘어났다. (줄임) 나는 소가 노는 날에는 소를 데리고 나가 마을 중 뜸 언덕의 풀을 뜯기거나 소가 일하는 날에는 소의 꼴을 베러 바랑이(바랭이) 풀밭으로 가서 왜낫으로 풀을 베다가 손가락을 썸뻑 다치기 일쑤였다."- 1990년 10월 12일 치 <경향신문>


해방 당시에는 소달구지를 보유한 집이 100여 가구에서 한두 집 정도로 지금의 덤프트럭보다 귀한 존재였다. 따라서 시골에서 소달구지는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트럭이나 다름없었다. 어린 고은의 아버지도 소달구지를 끌고 다녔다. 지게가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양의 퇴비나, 나무(땔감), 곡물 그리고 마을의 보리가마니를 면사무소 창고로 실어 날랐다.


고향집 건물들 흔적도 없이 사라져
 

▲ 고은 시인 생가터     © 조종안


기자는 최근 고은 생가터에 두 차례 다녀왔다. 은파호수공원(미제지) 제방에서 300m쯤 떨어진 언덕길에 있었다. 아파트촌 사이로 선제뜰이 내려다보이고, 옥정골 쪽으로 나지막한 산 하나가 보인다. 어린 고은이 문학의 꿈을 키웠던 할미산이다.


어린 고은은 할미산에 올라 이리(익산)행 증기기관차의 기적 소리와 금강 건너 장항제련소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며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였다.


할미산은 마을의 진산으로 고은 시인의 산문집과 자전적 소설 등에 자주 등장한다. 이 산 동쪽 마을(지곡리)에서는 대상그룹 회장을 지낸 고두모, 서쪽 마을(용둔리)에서는 세계에 이름을 떨친 고은 시인, 남쪽 마을(옥정리)에서는 건설부장관을 지낸 고병우 등 고(高)씨 가문에서만 인물이 셋이나 나왔다.


도마뱀이 많았던 할미산은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한국전쟁 때는 군산항 시설물을 폭파하기 위해 저공비행 하는 미공군 그라망 전투기들을 구경하는 장소가 됐다. 편대를 이룬 미공군 전투기들은 용둔마을 상공을 지나 군산에 다다르면 폭탄을 투하하고 하늘로 솟구쳐 날아갔다. 그러면 항구의 시설들이 폭탄을 맞아 불바다를 이뤘고, 이어 시꺼먼 연기가 피어올랐다고 한다.


잔디가 듬성듬성한 마당으로 들어선다. 고은 시인의 체취가 묻어있을 본채와 사랑채, 뽕나무 울타리, 외양간, 뒷간 등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안타까운 마음에 쓰러져가는 폐가라도 남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울창한 대밭이 대형 병풍처럼 펼쳐진다. 대밭은 시험공부보다 소설 읽기를 더 좋아했던 고은 학생이 일어판 <아라비안나이트>와 <천야일야>(千夜一夜) 등을 읽었던 독서실이자 쉼터였다. 전 국토를 피로 물들였던 한국전쟁 때는 야간 노력동원(집단 민간인학살)을 미리 알아챈 아버지가 중학생 고은을 데리고 피신했던 곳이기도 하다.
 
해마다 가을이면 붉은 감들이 꽃보다 아름답게 매달려 어린 고은을 즐겁게 해줬던 감나무가 객을 반긴다.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계절이니 예년처럼 붉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야 함에도 땡감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가 스산하게 느껴진다. 주인이 떠난 마당을 반세기 넘게 지키고 있는 감나무가 의젓하면서도 애처롭게 보인다.


패색이 짙어진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파놓았다는 방공호도 확인할 수 있었다. 방공호는 공습 대피용이었으나 삼복더위에는 시원한 원두막 역할을 해줬다고 한다. 마을에 인민위원회와 치안대가 조직되고 민간인 집단학살이 자행됐던 한국전쟁 때는 은밀히 가족회의가 열리기도 하였다. 소년이 된 고은이 이웃집 라디오를 빌려다가 잡음이 많은 방송을 남몰래 듣던 곳이기도 하다.


고은 생가는 그동안 잘못 알려져 있었다. 외지인은 물론 대부분 군산 시민도 어머니가 살았던 집을 고은이 태어나 자란 쌈 터로 알고 있었던 것. 그의 고향집 건물들은 다른 사람이 이사해 살면서 헐렸다고 한다. 생가와 어머니가 살던 집은 100m 남짓 떨어져 있었다. 도로명 주소도 생가는 용둔리 33이고, 어머니가 살던 집은 용둔리 53이었다.
 

▲ 고은 시인 어머니가 살던 집     © 조종안


 
 


원본 기사 보기:신문고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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