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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호 칼럼] 짠 맛을 잃은 소금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니다
성탄절은 다가오지만 그 느낌은 예전같지 않다.
용석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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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12/12 [20:39]  최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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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은 다가오지만 그 느낌은 예전 같지 않다.

 

코로나19바이러스 인체감염이 확인된 지 2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팬더믹종식을 은근히 기대했었다. 그러나 최근 변이바이러스 오미크론 출현 후 빠른 전염확산으로 오히려 종전보다 더 우리들의 삶이 얼어붙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크리스마스캐럴이 울려 퍼지고 구세군 냄비가 등장하면서 성탄절이 오고 있음을 알려줬으나 지금 불어 닥치고 있는 코로나 한파는 시장뿐만 아니라 종교계에도 움츠러드는 모습이 예외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사실, 세상 흐름 속에 예외가 있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예외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흐름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이나 권위나 거룩한 능력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과거 역사 속에서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작동했던 시절에는 하나뿐인 목숨을 던질 만큼 뜨거운 인류애와 거룩한 능력이 그들 속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그런 투철한 사명감과 능력이 지금도 종교계에 작동하고 있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 

 

생명작용은 사랑의 원초적 잠재력이 구현되는 현상이다. 그러기에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이다. 불교의 자비도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기에 생명의 근원이요, 인과의 최초 원인이 되는 하늘의 아들이 땅 위에 있는 생명을 속박과 사망에서 구하려는 지고한 사랑으로 인해, 하늘 보좌를 포기하고 땅의 맨 밑바닥 말구유에 태어났다. 종국에는 사랑실천의 최고정점인 저주의 십자가를 지고 인류의 허물을 대신 갚아주는 숭고한 죽음을 실행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성탄절의 메인 팩트다. 

 

성탄의 목적을 이루는 데 쓰임 받는 것이 바로 교회의 목적이다. 결코, 강력한 교단을 세운다거나 감투를 쓴다거나 웅장한 건물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돈을 벌거나 유명해지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처음 사랑과 처음 목적을 혼동하면 배가 산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목적이 좋으면 수단도 좋아야 한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것은 부패한 땅의 논리다. 하늘의 논리는 거룩한 목적이라도 부패한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오미크론 확진자로 판명된 한 목회자가 감염사실을 거짓 진술하고 은폐하여 감염속도를 더 빠르도록 일조했다는 뉴스를 보면서도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고 평범한 일로 느껴지는 것은 슬픈 일이다. 목회 사역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스스로 공지하고, 스스로 격리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양심의 눈을 질끈 감고 능숙한 솜씨로 속여서 돈을 버는 악독 상인의 마음과 차별화되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랑의 실천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하는 것이지, 출세하여 힘이 생긴 후에만 하는 것은 아니다. 부끄러운 뉴스들이 반복적으로 회자되어도 ‘벌거벗은 임금님’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비겁한 어른들의 행태를 가지고서는 진정 하늘 사랑이 온누리에 살아 숨 쉬는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지도자의 양심이 그 집단의 양심이요. 지도자의 정직이 그 집단의 정직이기 때문이다.

 

해수욕장에 있는 인명 구조실이 그 목적을 상실하고 세력다툼이나 노름판이 될 수 없듯, 영혼의 재난 구조실 같은 구원의 방주, 즉 교회가 그 목적을 상실하면 더 이상 구원의 방주가 아니다. 진실과 거룩이 증발되었기 때문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다는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산행 중에 길을 잃으면 정상으로 올라가야 방향을 되찾는다. 처음 목적과 처음 좌표를 다시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늘이 다시 이 땅을 찾으실 때, 국가 간 대사로 부임할 때에 행하는 아그레망처럼, 어느 교단, 어느 직책 높은 분에게 신고하고 방문할까요? 그렇지 않음을 인정한다면 처음목적을 상실한 우리의 모습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왜 그토록 직책에 연연하며, 계급을 따지고, 자리의 변칙 대물림을 위해 에너지를 쏟아 왔던가? 왜 그토록 영악한 사람이 하늘의 로열티를 독과점 하도록 허용했던가? 종교계에서도 일반 세상처럼 종교 정치꾼을 평범한 신앙인보다 더 능력자로 인정하고 박수를 쳐줬기 때문은 아닌가? 

 

우리가 지금까지 한 시대를 살면서 예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들이 전 지구 도처에서 연일 일어나고 있다. 고고학적 분석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사라진 공룡이 생존했던 기간이 우리 인류가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다고 추정하는 기간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길었다는 이야기다. 그토록 장구하게 살던 동물도 한 순간에 멸종하는 마당에, 짧은 기간 출현했던 인류라고 해서 지구가 없어질 때까지 살 것이라는 가정을 감히 할 수 있겠는가? 

 

천년만년 이대로 살 것이라는 착각을 버리자. 불확실한 세상을 살면서 언제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자. 그렇다면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며 비겁하게 살 이유가 있겠는가? 

 

코로나 속에서도 정치의 계절은 어김없이 도래하고 있다. 속세에서나 비 속세에서나, 정치인이나 비 정치인이나, 짠 맛을 잃어 길가에 버려지는 소금은 더 이상 소금이 아님을 기억하자. 

 

 

윤영호 칼럼니스트(시인, 수필가,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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