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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홍천읍지 이야기 9] 한교료강(旱橋潦舡)

가물면 다리를 놓고, 큰 비 오면 배를 띄우다.

용석춘 기자 | 기사입력 2021/03/01 [13:44]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홍천읍지 이야기 9] 한교료강(旱橋潦舡)

가물면 다리를 놓고, 큰 비 오면 배를 띄우다.

용석춘 기자 | 입력 : 2021/03/01 [13:44]

한교료강(旱橋潦舡)

가물면 다리를 놓고, 큰 비 오면 배를 띄우다.

 

 

 


홍천군청 홈페이지 첫 화면을 장식하는 문구는 대한민국 대표 건강놀이터이다. 홍천군은 이 문장으로 홍천을 설명한다. 이 짧은 문구는 홍천의 현재를 얘기함과 동시에 홍천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 문장 하나만으로도 홍천의 풍요로운 산과 강을, 몸으로 즐기는 레저·스포츠를, 다양한 먹거리를 떠올리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조선시대 홍천은 어떤 문장으로 표현되었을까? 1454년에 발행한 세종실록지리지땅이 메마름이 많고, 기후는 추위가 많다. 厥土塉多 風氣寒多.’라고 적었다. 땅이 척박하고 날씨마저 매우 추운 지역이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임업이 주산업이었던 조선시대 홍천을 표현하는 문장 역시 농·임업의 토대인 땅과 날씨에 대한 언급으로 홍천을 설명했다.

 

뒤이어 개간한 밭이 5,579결이다, 논은 겨우 148결이다. 墾田 五千五百七十九結 水田 止一百四十八結.‘이라고 적었다. (()은 토지의 면적과 수확량을 동시에 표시한 계량 단위다. 이른바 결부법으로 논과 밭의 면적을 적었다. 결부법은 파(), (), (), ()이 단위다. 1파는 벼 한 줌, 1속은 10, 1부는 10, 1결은 100부의 수확량이 나오는 토지를 말한다. 따라서 1결은 1만 줌 정도의 수확량이 나오는 토지다. 수확량에 따라 결정되므로 정확한 면적을 정하기 어렵다. 같은 면적이라도 기름진 땅은 수확량이 많아 결수가 높고, 척박한 땅은 결수가 낮았다. 산간지역답게 논이 적었다.

 

논과 밭의 규모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만 따로 떼어 보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이후 발행된 여지도서홍천현읍지 규장각 소장과 비교하게 되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여지도서에는 한전 40641. 수전 418부로 적혀있고 홍천현읍지 규장각 소장에는 한전 493343, 수전 40542속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전은 밭을 말하고, 수전은 논을 말한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논과 밭이 현저히 줄었다. 결부법의 변화에 의한 혼란인지, 아니면 단순 기록의 실수인지 연구해 볼 항목이다.

 

1530년에 발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땅과 날씨가 아닌 사람 사는 모습과 자연에 관해 기록했다. ‘민속은 순박하고, 소송은 맑고 간단하다. 民俗淳朴 詞訟淸簡.’ 서거정의 학명루기에 나오는 문장을 따로 떼어내 풍속(風俗)’ 항목에 적었다. 바로 다음 형승(形勝) 항목에는 마을은 그윽하고 청량하며, 산과 물은 맑고 빼어나다. 邑居幽爽 山水淸奇.’로 마을의 풍경과 자연을 표현했다. ‘()’는 글자 그대로 기이하다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특출나다, 빼어나다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형승 역시 서거정의 학명루기에서 문장을 인용했다. 형승은 지세나 풍경의 뛰어남을 일컫는 말이다.

 

서거정((1420 ~ 1488))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평가받는 서거정은 동국여지승람의 제작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가 쓴 한 문장, 한 문장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 지역을 설명하는 짧고 명료한 문장으로 남아 있다. 서거정이 지은 사가집에 기록된 학명루기는 1448년 봄에 홍쳔현감으로 부임한 윤지가 학명루를 짓게 된 배경과 위치, 이름의 유래 등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학명루기 전문은 신증동국여지승람강원도지에 실려 있다. 이후 발행된 홍천읍지 대부분의 풍속과 형승 항목에 같은 문장이 나온다.

 

한 걸음 더 들어가 학명루기에 실린 조선 시대 홍천의 모습을 엿보자.

 

원주의 곁에 있는 현이 바로 홍천이다. 홍천은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깊숙하고 궁벽진 곳이지만 잘 다스려져서, 백성들의 풍속이 순박하고 다툼과 소송이 맑고 간소하여 다스리는 즐거움이 있는 고을이다. 나는 어려서 영서에 유학하면서, 원주에서 춘천으로 갈 때 몇 번 홍천을 지나다녔다. 고을은 그윽하고 밝으며 산수가 맑고 빼어났다. 백성과 물산이 풍부하고 수목이 울창했다. 原之旁縣曰洪. 洪環山水. 抵奧僻而理. 民俗醇朴. 詞訟淸簡. 有爲州之樂. 焉予小也. 游學嶺西. 自原之春. 再道于洪而過之. 喜其邑居之幽爽. 山水之淸奇. 民物之富饒. 樹木之蓊欝.’

 

서거정이 원주와 춘천을 오가며 들렀던 홍천에 관한 기록이다. 그중 民俗醇朴. 詞訟淸簡.’喜其邑居之幽爽. 山水之淸奇.’를 따로 떼어내어 풍속과 형승 항목에 기록한 것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지지에 홍천의 모습을 단 4자로 표현했다. ‘가물면 다리를 놓고 큰 비가 오면 배를 띄웠다. 旱橋潦舡홍천강의 또 다른 이름인 남천을 표현한 문장이다. 추수가 끝나는 가을 끝 무렵 홍천강에 섶다리를 놓아 마을과 마을을 이었다. 겨울과 봄을 견디고, 여름을 맞아 장마가 오면 섶다리는 강물과 함께 쓸려 내려간다. 섶다리가 쓸려 내려가면 배를 띄워 마을을 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긴 나무로 얼개를 만들고 그 위에 솔가지와 흙을 덮어 섶다리를 만들었다. 홍천에 나무를 가공하는 제재소가 많아지면서 일명 죽데기를 이용한 섶다리가 등장한다. 주로 땔감으로 많이 쓰는 죽데기는 통나무의 표면에서 잘라 낸 널조각이다. 2009년부터 팔봉산 앞 노일리에서 섶다리 마을 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출처 백승호 벌력 콘텐츠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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