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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호 칼럼] ♥ 욕망의 격을 높여라

쾌락’에서 ‘가치’로

용석춘 기자 | 기사입력 2021/01/27 [16:26]

[윤영호 칼럼] ♥ 욕망의 격을 높여라

쾌락’에서 ‘가치’로

용석춘 기자 | 입력 : 2021/01/27 [16:26]
 

 


코로나19 바이러스 펜데믹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났다. 그로 인해 지구촌인구 200만명이상이 죽었지만 아직도 확진자수와 사망자수는 늘어만 가고 있다. 사회 경제 종교 교육 스포츠 오락등 모든 삶의 영역에서 기존의 생활수단과 기능이 한 순간에 멈추거나 위축되었다. 당장 수입이 줄어들어도, 당장 답답하고 재미가 없어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제적 공권력의 발동에 따르는 길 이외는 대안이 없었다.

 

그토록 건강했던 필자의 친구가 바이러스감염으로 한 순간에 세상을 뜨는 것을 목격하면서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라는 현실감이 더욱 뚜렷해졌다. 주소를 달리하는 가족은 5인 이상 만날 수조차 없는 이산가족이 되어도 어쩔 수 없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최대의 방역은 마스크쓰기와 사회적 거리두기 외에 뾰족한 방법이 없다. 바이러스 전염에 노출되기 쉬운 환경이 바로 3밀, 즉 밀접 밀집 밀착이기 때문이다. 결국 단절과 거리두기가 방역의 주축인 셈이다. 백신의 완벽한 효과는 아직도 미지수다. 코로나의 변형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의 세상으로 완전히 회귀하기는 어렵다는 인류학자들의 예상에 따라 포스트코로나(Post-COVID)시대의 신인류(新人類)가 살아가는 보편적인 삶의 행태를 “뉴 노멀(New Normal)”이라는 패턴으로 우리의 개념 속에 자리잡아가고 있다. “올드 노멀(Old Normal)” 패턴으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올드 노멀’ 세상에서 ‘뉴 노멀’ 삶의 패턴으로 갈아타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바꾸어야 할 것은 무엇이며, 그에 따라 가장 저항하는 대표적 심리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바로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비밀통로를 통하여 불법영업을 하고 있는 광란의 현장에 감염위험이나 적발에 따른 사회적 망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줄서서 기다리는 현상은 이를 단적으로 웅변해주고 있다.

 

그동안 밀접 밀착의 환경 속에서 추구하던 것들 중에서 인생을 파멸로 이끌었던 주범이 바로 끝없는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이었다. 육체적 쾌락은 말초적 감각기관 즉, 눈 귀 코 혀 몸의 환상적 느낌을 탐착하고 확장하는 것이기에 근본적으로 밀착을 요구한다. 정상적인 범위를 넘어서는 성적자극 욕망이 대표적인 것이다. 

 

인류 역사상 이토록 성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타락한 시대가 있었던가? 기술문명의 발달과 함께 타락의 속도와 범위가 최고조에 이른 지금의 현상이 진정 정상적인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다. 좋은 것보다 안 좋은 것이 더 확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거룩한 쪽으로 가기는 어렵지만 타락하기는 쉽다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쾌락에 대한 욕망을 무조건 강제로 억제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어느 면에서는 삶의 기본 에너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본능적 에너지의 분출 방향을 틀어주어야 한다. 즉 욕망의 불길에게 안전한 출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것만이 브레이크 없는 쾌락의 탐착(貪着)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쾌락의 속성을 꿰뚫어보는 혜안이 필요하다. 쾌락은 한마디로 단락(短樂) 장고(長苦)다. 즉 짧은 행복, 긴 불행이라는 것이다. 쾌락은 흩어지는 속성이 있어서 순간 사라진다. 즐겁다고 해서 우리가 5분 이상 계속해서 웃을 수 있던가? 울어서 죽지는 않지만 억지로 오래 웃으면 죽는다. 반대로 고통은 뭉쳐지는 속성이 있어서 길게 지속된다. 그래서 뭉쳐진 고통을 우리가 계속 되 뇌이고 거기에 억울하다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슬픔은 재생산된다. 그러기에 슬픔을 강제로 잊거나, 흩어진 쾌락의 느낌을 지속적으로 다시 모으고 강화하기 위해서 더 자극적인 쾌락을 끝없이 추구하다가 현실세상에 없는 몽상적 쾌락까지 탐닉하는 행동이 바로 독주(毒酒)나 야동(野童)이나 마약(痲藥)의 중독인 것이다. 감정과 감각의 무대에서 황홀감을 추구하다보면 결국 허무라는 종착역에 이르기 때문이다. 

 

‘쾌락추구’에서 ‘가치추구’로 욕망의 방향을 전환하라.

 

인간의 지고한 행복은 말초신경의 자극에만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지성과 영성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 있다. 그 의미는 가치를 창조하거나 통찰력이 증득(證得)되는 곳에서 발현된다. 역사적으로 하늘 계시수준의 지성을 밝혀주었던 별 같은 최고 성현들의 가름침은 우리 인류의 삶의 지평을 넓혀주는 가치를 구현했다. 그전에는 볼 수도 알 수도 없었던 안목과 통찰력이 오늘날까지 우리들에게 보편적 삶의 지도가 되었다.

 

문자의 발견과 종이의 제조, 인쇄활자의 발명은 국지적으로 한 시대에 국한해서 전해지던 그분들의 지혜를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서 우리 세대까지 전해져 우리가 혜택을 보고 있다. 그것도 가치의 생산이다. 계절의 변화와 지구행성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규칙성을 발견한 까닭에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사실을 예측하면서 불안하지 않고 봄을 대비한다. 그것 또한 선한 가치추구의 결실이었다. 독서와 일상을 통해 깨달은 생활 지혜를 세상에 전해주는 젊은 작가들의 상큼한 지성 또한 리버스 멘토링 (Reverse Mentoring) 할 만한 가치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현실 삶속에서 우리가 나름대로 인류의 지속가능한 행복을 위해, 깨끗한 자연환경의 보전을 위해, 여타의 진선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욕망의 방향을 ‘쾌락’에서 ‘가치’로 전환함으로써 몰랐던 세상이치를 깨닫게 되거나, 이 땅에 와서 쓰레기만 남기고 가는 것이 아니라 뭇생명을 위해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느끼는 보람과 환희를 생각해보라. 그걸 어찌 순간의 쾌락과 견줄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욕망의 격이 다른 만큼 즐거움의 격(格)도 다른 것이다. 그런 욕망이라면 부작용도 없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강한 특징이 바로 가치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구하는 행동이다. 그러기에 살아야 할 이유와 가치 있는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살하지 않는다. 코로나19펜데믹 이후 변화된 세상에서도 공허에 빠지지 않는다. 추구하는 가치와 목적이 내 삶을 이끌어 주는 강한 동인이며 자기실현의 힘찬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윤영호 칼럼니스트(시인, 수필가,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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