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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호 칼럼] 코로나 비상시국, 습관적인 신앙과 종교관행을 되돌아본다

용석춘 기자 | 기사입력 2020/09/15 [12:36]

[윤영호 칼럼] 코로나 비상시국, 습관적인 신앙과 종교관행을 되돌아본다

용석춘 기자 | 입력 : 2020/09/15 [12:36]

 ♥코로나 비상시국에 습관적인 신앙과 종교관행을 되돌아본다. 

 

 

 

 

하나님을 말하는 이는 많아도 하나님을 느끼게 하는 이는 많지 않다. 부처가 되는 법을 말하는 이는 많아도 부처의 모습을 확연히 보이는 이는 많지 않다. 설교와 강론과 법문을 통해 교리와 교훈을 수없이 들어왔어도 인간이 성화되거나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내지 못하는 이유는 왜일까? 

 

하늘기관인 양심을 통해 순간순간 지속적으로 하늘 만나의 맛을 음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습관적으로 혹은 강압에 의해서 신앙을 억지로 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힘겹지 않고 기쁘게 움직이는 힘은 역시 감동이다. 스스로 따르게 하는 힘은 귀로 듣는 지적이해보다 눈으로 보게 하는 감동의 힘이 더 강력하고 지속력이 있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인 듯싶다.

 

근본적으로 신앙의 능력은 거룩성과 진실성 그리고 사랑의 능력과 향기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남을 밟아야 내가 일어설 수 있다는 이기적인 세상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는 반대방향의 지향성이 있기 때문이다. 혼탁한 세상과 차별성이 없는 종교나 신앙은 무늬만 그럴듯한 세상단체와 다를 바 없다. 

 

그러기에 그 길은 범인에게 인기 없는 좁은 길이요. 중생에게는 버거운 수행의 길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좁은 길, 인기 없는 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능력은 인기스타의 세상공연처럼 현란하거나 카리스마 넘치는 통치자의 강압적방법만으로는 지속될 수 없다. 특정인의 인기나 힘을 하늘은 어느때까지 무한정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방역차원의 강제적인 거리두기와 직접 대면의 중단으로 철옹성 같아 보였던 종교관행이나 일상이 빠르게 변화하여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싫던 좋던, 영상예배, 화상강의, 영상미팅의 원격접속 방법으로 그 출구를 찾고 있다. 물론 직접대면 때와 같은 효과는 현격히 줄어들지만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편한 환경과 상황이 불과 6개월사이에 우리의 현실이 되어있다.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경천동지할 이 상황에서 우리는 하늘을 원망하고 짜증만 내고 있을 것인가? 

 

중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에야 비로소 평소 건강과 관련된 삶의 습관을 되돌아보듯, 어디로 가고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돌아가던 세상이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정지되거나 감속되어 힘겹게 돌아가는 이 때에, 우리는 그동안 우리의 삶의 습관과 관행을 되돌아 보야야 한다. 특히나 종교의 영역 같은 불가침영역은 이런 때가 아니면 반성하거나 반추해볼 기회를 가질 수 없는 하늘이 주는 절호의 기회다. 아니 오히려 하늘은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우리는 교회나 절이나 성당을 습관적으로 다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세상과 구별되는 그곳에 왜 가는지? 갈 때마다 그 이유를 생각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 가치를 되새기면서 우리의 내면을 가다듬어야 했다. 사람소리가 아니라 하늘의 음성을 들어야 했고, 중생의 쾌락이 아니라 깨달음의 환희를 그때마다 맛보아야 했다. 사람에 대한 아부나 체면이 아니라, 하늘에 대한 경외와 감사함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함을 얻어야 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속에 자기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동은 외부에 눈치보지 않고 절제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 않겠는가? 

 

오래전 장로가 되는 교육과정면접에서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앞으로 각 지교회의 운영형태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그 때 나는 겁없이 대답했다. “주변 여건과 상황이 현격히 다른데도 불구하고 천편일률적으로 교회마다 똑 같은 조직형태로 똑 같은 품목과 좌판을 벌이는 “백화점 같은 교회”가 아니라, 목회자 능력과 주변여건에 따라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는 “전문점같은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뱁새가 황새 따라가듯 하지 않고, 인도자나 따르는 사람의 힘과 영적능력이 고갈되지 않아 천부의 능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코로나 정국으로 변화된 세상을 보면서 그때 했던 나의 대답을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하늘의 기운을 특정 건물에 가둘 수 없고, 우주의 법칙을 특정제도에 가둘 수 없다. 그러기에 온전할 수 없는 인간이 독선(獨善)에 빠지면 폭력을 낳는다. 나와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틀림으로 단정하게 되면 내 맘에 맡도록 남을 강제로 고치려 하기 때문이다. 선하고 옳은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내 맘에 맞도록 남을 고쳐야만 직성이 풀린다면 그것은 영적 교만이고 중병이다. 내가 선악기준을 정하거나 무흠하게 해석할 수 있는 하늘은 절대로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아니되기 때문이다.

 

윤영호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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