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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국면에 감히 꺼내는 교회의 돈 이야기

김혜령 / 이화여자대학교 호크마교양대학 교수

홍천뉴스투데이 | 기사입력 2020/04/08 [14:40]

코로나19 국면에 감히 꺼내는 교회의 돈 이야기

김혜령 / 이화여자대학교 호크마교양대학 교수

홍천뉴스투데이 | 입력 : 2020/04/08 [14:40]

목회자 사례비와 개교회 운영 구조에 대한 인식, 이대로 괜찮은가

 

천박하게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돈' 이야기를 꺼내고자 한다. 내 남편은 감리회 소속 작은 교회 목사이다. 2년 전 부임한 교회는 역사가 오래되어 다행히 예배당으로 쓰는 상가 한 층을 소유하고 있어서 임대료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교인이 적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어려운 분들이셔서 헌금이 많지 않다.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교회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맞추는 게 어려웠다. 올해 들어 담임목사 월급과 해외 선교비를 삭감했는데, 그러다가 코로나19가 터졌다.

 

 

 


처음부터 온라인 예배를 시작했고, 당연히 교회 재정은 더 악화됐다. 계좌 이체로 헌금해 주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교인분들 삶이 어려워지는 상황이라 줄어드는 교회 재정 상황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오랜 친구가 사정을 알고 멀리서 헌금해 주어 이번 달 교회 운용비는 겨우 충당되었다. 물론 이러한 어려움은 작은 교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큰 교회들도 나가야 할 재정의 규모가 있을 터인데, 예배당에 모여 예배하지 않으니 헌금도 액수 측면에서 현격히 줄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을 지금 공론화하는 것은 미친 짓일지 모르겠다. 여전히 예배당 예배를 포기하지 못하는 교회들이 있고, 세상은 교회가 이러한 시국에 헌금 때문에 예배당 예배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이 시점에서 교회 재정 운운하는 일은 의심의 눈길에 증거를 대 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어리석은 일일 수 있겠다. 나 역시 한국교회가 지난 수십 년간 과도한 성장주의와 물신주의에 경도되어 온 것을 기회가 될 때마다 비판하며 자성하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던가. 그래서 비가 오면 그냥 맞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비판을 들을 때에는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는 게 지혜롭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첫 판단을 뒤집어, 노골적으로 교회의 돈 이야기를 꺼내기로 마음먹은 것은 우리 교회 사정을 널리 알려 동정을 얻기 위함이 아니다. 우선, 얼마 전 코로나19로 발생한 헌금 문제를 다룬 <뉴스앤조이> 기사에 달린 댓글들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아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19 사태가 생각보다 매우 오래갈 수도 있기에 새로운 예배 패러다임을 만들지 않으면 교회가 한국 사회 코로나19 대유행의 촉매자가 될 것이라는 이재갑 감염내과 전문의 인터뷰 기사도 보게 되면서,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쓰던 논문을 잠시 덮었다.

 

충격을 받았던 기사 이야기를 먼저 하자. 최근 코로나19 사태 이후 발생한 작은 교회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리포트하며, 담임목사들이 일용직 노동에 내몰리는 현실에 대해 인터뷰를 첨가해 보도한 기사였다. 페이스북에 포스팅된 기사에 달린 댓글 상당수가 담임목사들에 대한 비난 일색이었다. 그동안 교인들 돈으로 호의호식해 왔으면, 이제 반성하고 열심히 이중직으로 노동해서 자급자족하라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또 작은 교회는 능력이 없어서 교회가 크지 않았던 것이라며, 능력 없는 목회자를 향한 비난도 있었다.

 

아무리 코로나19로 교회가 자중할 때라고 해도, 이러한 격한 반응들에 대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되었다고 봤다. 더군다나 한국교회가 예배당 예배를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뤄야 코로나19 전파가 늦춰질 수 있다는 전문가 말에 따르려면, – 교회가 영적인 공동체만이 아니라 물질도 필요로 하는 공동체라는 현실을 고려하여 – 돈 이야기를 나라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일부 목사들의 이중직 노동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내 남편도 신학교에서 한 학기에 한 강의는 맡고 있다. 그래서인지 교회 재정이 어려우면, 교인처럼 목사들도 다른 수단을 찾아 임금을 벌라는 말에 – 좀 야속해도 – 바로 반론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주장들을 지켜보며 한국 사회에서는 교회를 연 목회자들도,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도, 교회를 지켜보는 세속 시민들도 모두 '교회의 시작'(개척)을 '사업체 개업'과 다르지 않게 생각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다시 말해, 시장의 논리로 교회 개척을 바라보는 것이다. '기독교'라는 시장에서 '교회'라는 사업체 사장이 되었다면, 그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시장 논리가 우리 모두에게 박혀 있는 것이다. 비판받는 사람도, 비판하는 사람도 모두 그리스도 복음의 틀이 아니라 자본주의 틀로 교회 재정을 보고 있다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목사들 중 일부는 – 물론 아주 일부지만 – 재정이 탄탄한 아버지 교회를 사업체처럼 물려받거나, 인맥을 동원하여 자리를 거래한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가 기업의 CEO처럼 자기 능력을 증명하여 재정이 독립된 교회의 수장에 고용된다. 이도 저도 모두 해당되지 않는 상당수 목사들은 새로 오는 담임목사보다 자기 나이가 많아지게 될 때까지 최대한 버티다가 자신의 교회 사업체를 열며 독립하게 된다. 하지만 독립해서 모두 성공하지는 못한다. 이 중 몇몇만이 성공 신화를 쓸 것이다. 나머지 대부분은 자기 말씀의 능력 없음에, 혹은 한국교회 교인들의 듣는 귀 없음에 한탄하며 새벽 기도 십자가 앞에 눈물로 기도하는 운명에 처한 채 평생 개척교회 목사 타이틀로 살아간다.

 

내가 이 글을 부끄러움 속에서도 이렇게 적어 내려가는 것은 대부분 한국 개신교에서 성공회를 제외한 개교회의 경우, 대부분 목회자들이 사재를 털어 개척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업체는 결코 아니지만, 사업체처럼 운영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다. 초기 개척 비용과 이후 필요한 운영 비용에 담임 목회자 사재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말이다. 우리 사례를 들면, 유학에서 돌아온 남편이 40세가 넘어 안수를 받기 위해 개척해야 했을 때, 그나마 운이 좋아서인지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85만 원의 작은 예배당을 서울에서 임대할 수 있었다. 교인 하나 없이 시작했기에, 남편과 나는 여러 학교를 돌아다니며 강의해서 벌어 오는 돈으로 교회 월세와 운영비 상당 부분을 충당했다. 기적처럼 찾아오는 교인들과 선교비가 없었더라면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버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감리회 모 연회에서 서울에 개척 자리를 또 내주는 것은 다른 교회 선교를 방해할 수 있으니 안 된다고 거절했던 경험이 있기에, 우리는 영등포지방회에서 교회를 열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재정의 어려움은 개척하는 목회자라면 당연히 겪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견뎠던 것 같다.

 

다행히도 2년 전 남편이 지금 시무하는 교회로 초빙받아 옮겨 오면서 월세도 안 내고, 월급도 지금까지는 매달 받을 수 있었다. 그때 주변에서는 백도 없는 목사가 이런 교회에 갈 수 있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남편이 가르치는 대학원 신학생들에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가 목회자가 아닌 신학생들에게) 매우 닮고 싶은 성공 사례로 회자되었다고 한다. 물론 솔직히 고백하자면, 우리 남편이 어떠한 조건도 없었는지는 모르겠다. 남들보다 조금 더 긴 학력과 사택이 제공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이 교회로 부임하게 된 외적 조건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우리에게 임한 이 축복을 오로지 열심히 인내하며 참고 충성해 온 우리 부부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온전히 고백할 수가 없다. 열심과 충성으로 따지자면, 우리보다 훨씬 더 노력하는 목회자 부부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내가 이러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은 개교회 탄생이 목회자 부부의 재정적 헌신, 나쁘게 말하면 투자로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공유하고 싶어서다. 그러다 보니, 만약 입지 조건이 좋거나 혹은 말씀의 능력이 있어서 교회가 성장하게 되면, 그 교회에 모이는 재정이 누구 것이냐는 근본적 물음이 발생하게 된다. 안되면 목사의 투자 실패, 잘되면 목사의 투자 성공? 그러니 목사 맘대로 운영되는 재정 구조가 되기 쉬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돈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인지, 분노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다. 이제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해야겠다.

 

1. 교회의 재정을 자신의 첫 투자에 대한 대가로 여기는 목회자가 있다면, 생각을 고쳐먹어야 한다. 얼마를 드렸든 그것은 투자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드린 예물이다. 헌금은 평신도만이 아니라 목회자도 해야 하고, 때에 따라 제일 많이 하기도 한다. 실제로 개척교회 재정은 목회자 부부 헌금과 무급 노동 없이는 유지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교인의 돈으로 목사가 호의호식해 왔다는 비난을 너무 쉽게 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목회자의 헌물과 헌신이 누구보다 크더라도, 교회가 성도의 모임인 공교회가 되는 순간 모든 재정은 공교회 것이 된다. 목회자의 헌물과 헌신은 투자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게 일체의 권리가 양도된 공재산이 된다. (주인은 하나님이지만, 관리 권한이 교회 공동체에 공유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 재산은 목사의 사유물이 될 수 없고, 이윤을 남기기 위해 거래될 수도 없는 것이다.

 

2. 그러나 교인들도 생각을 완전히 바꿔 먹어야 한다. 한 교회 공동체 일원이 되었다면, 그 책임도 나누어지는 것이다. 목회자 빈곤을 목회자 능력 부족 탓으로 돌리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자본주의에 익숙해져 있다는 증거다. 교인은 자기의 문화적 취향이나 지적 취향에 맞는 교회들을 쇼핑하듯 돌아다니며, 헌금을 그에 대한 사용료나 회비 정도로 여기지는 않았는지 성찰해 봐야 한다. 최근 들은 이야기 중에, 한 장로는 목사와 사이가 좋으면 십일조를 내고, 사이가 나쁘면 십일조를 내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극단의 예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교인은 헌금을 도구 삼아 목회자를 조련하면 안 된다. 그의 생존이 위태할 수 있다. 교인은 목회자의 양이 아니다. 예수님의 양이다. 목회자는 다만 '앞서가는' 양일 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목회자는 평생 자신의 노동을 하나님과 교회 공동체에 바치겠다고 헌신한 사람이다. 그러니, 노동의 결과로 말씀과 돌봄을 받는 교인들에게는 목회자에게 정당한 노동 대가가 지급되어 생존에 어려움이 없게 할 의무가 있다. 그 의무를 너무 쉽게 기분에 따라, 예배당 출입 유무에 따라 '했다 안 했다'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물론 교인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이 임무를 멈출 수도 있고, 덜 수행할 수도 있다. 이를 두고 목회자가 헌금을 강요해서도 절대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목회자를 능력 없는 사장처럼, 혹은 투자를 잘못한 자영업 사장처럼 대해서도 안 될 일이다.

 

3. 개신교는 개교회 중심이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교회에 모두 속해 있다. 초대형 교회에서 편하게 신앙생활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지역 교회로 흩어져야 한다. 십일조가 일주일에 몇 억씩 쌓여 돈을 주체할 수 없어 부동산을 사들이고, 언론사를 사들이는 교회가 되지 않도록 기독교인들은 흩어져야 한다. 작은 교회 목사들 말씀에 능력이 없다고 투정하지 말고, 흩어져서 그들이 말씀을 공부하고 선포하는 일을 쉼 없이 연습하여 나아질 수 있도록 피드백을 주며 함께 성장해야 한다. 실제로 돌아보면, 말씀을 잘 전하는 작은 교회 목사들이 무수히 많다. 부모가 다니던 교회, 거기서 생기는 안락한 인간관계, 그래서 발생하는 이익들을 벗어나, 'social mix'가 되는 작은 교회에서 나 자신과 전혀 다른 배경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섞일 줄 알아야 한다. 초대교회에 부자와 가난한 자가 밥을 같이 먹지 않아 크게 문제가 된 사건을 기억하라. 교회에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흩어져서 책임을 갖고 신앙생활해야, 교회가 목사의 사유재산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성숙한 기독교인이라면 더 이상 쇼핑하듯, 의료서비스를 소비하듯, 세련되고 편안하고 인맥 좋은 곳을 찾아 교회와 목사를 소비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곧 한국교회를 망치는 데에 일조하는 길이다.

 

4. 목회자가 사재를 털어 개척하는 방식에서 성도들의 공동체가 목회자를 초빙하는 방식으로 이제 정말로 바뀌어야 한다. 유대교는 한 랍비를 먹여 살릴 만큼 교인들이 모이지 않으면, 회당 설립을 허가해 주지 않는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이를 적용해 보자면, 현재 개교회 중심 재산 운영에서 교단 차원의 공동 재산을 마련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이 와중에는 큰 교회의 헌신이 필요하다. 큰 교회는 더 이상 작은 교회 교인들을 수평 이동하는 방식으로 선교하면 안 된다. 향후 10년간은 조금 더 성장할지 모르겠지만, 이 방식을 지속하다가는 작은 교회가 모두 죽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한국 개신교가 밑바닥부터 흔들리다 보면 20년 뒤에는 – 미국의 대형 교회들처럼 – 사람이 넘쳐나던 초대형 교회 예배당이 부동산 시장 매물로 나오게 될 것이다.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이제 작은 교회의 재정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작은 교회가 평수가 작다고 영적 '만나'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 들어가는 공과금과 유지비, 인건비가 실제적으로 있다.

 

작은 교회 목회자는 170만 원도 안 되는 사례비로 가족을 살릴 영적 묘안을 갖고 있지 않다. (170만 원이라고 적어서 이것도 많다고 놀라는 목사님들이 계실 것이다. 나도 고민했다. 100으로 할까, 150으로 할까. 그러나 170만 원도 full-time 노동자 최저 월급에 한참 못 미친다. 100이건 170이건 못사는 건 마찬가지라서, 앞으로 논의 기준이라도 높이자는 의미에서 170이라 쓴다.) 교단이 목사 안수를 위해 결혼을 의무화하거나 장려한다면,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풍요롭지는 않더라도 가족을 부양하는 데에는 가슴 아프지 않은 차원의 월급이 지급되어야 한다. 내가 성직자의 거룩한 사례비를 굳이 월급이라 부르는 것은 사례비라는 거룩한 이름 속에 '생존을 위한 직업으로서의 정당한 대가'라는 의미가 종종 너무 쉽게 희석되기 때문이다. 교회 공동체가 감사해서 목사에게 주는 돈이 아니라, 정당한 대가로 주는 돈이라는 의미가 지금 이 시점에서는 더 많이 되살아나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다시 말해, 목사가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데에 품위를 잃지 않을 수 있는 정당한 월급이 지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교회 공동체가 목사 아내의 노동을 착취하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더 심각하게 남편 목사마저 아내가 그렇게 희생하는 값어치를 알아 주지 않는다면, 목사 부부의 관계는 밑동부터 썩어 가게 될 것이다.) 물론 목회자 초빙 방식이 바뀌고 정당한 월급이 지급되려면 교단이 지금부터라도 신학교 교육의 인원 조정과 목회자 윤리를 강화하는 평생 교육에 매우 집중적인 관심 쏟아야 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다.

 

5. 목회자 월급을 교인 수에 따라 무한정 늘어나는 CEO식의 월급 체제에서 전환해야 한다. 수천만 원의 목회비를 영수증도 없이 쓰는 목회자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독일이나 프랑스 알자스 지역은 목회자를 준공무원 형식으로 청빙하여 종교세로 월급을 지급하는데, 하급 공무원 수준에서 시작하여 그들의 연차 정도의 임금 상승률로 적용받는다고 한다. 단, 유럽의 대부분 교회는 부동산을 오래전부터 많이 가지고 있어서 목사 사택은 대부분 지급이 가능하다. 목회자 월급을 우리 사회 노동자의 평균 이하에서 출발하여, 평균 정도로 은퇴할 수 있는 임금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교인들의 삶의 무게를 목회자가 함께 느끼며, 삶에서 나온 말씀을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6. 현대 경제체제에 맞는 십일조 논의를 신학적으로 새롭게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보다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대부분 도시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은 물가 상승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대부분 노동자들의 임금은 가정을 꾸려 삶을 유지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수준에 묶여 있다. 최근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 대부분이 경제적인 이유임을 기억하자. 대부분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이 너무 팍팍하다. 거기서 10%(+@)라는 금액은 자녀 교육을 포기하거나, 취미 생활을 포기하거나, 저축이나 보험을 포기할 때 가능하다. 최근 나오는 의미 있는 통계들을 보면, 수입이 적은 사람들의 지역에 있는 교회들의 교인 이탈이 그렇지 않은 지역보다 빠르게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동체 일원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성실히 교회를 다니기에는 일부 교인들 삶이 너무 팍팍하다. 이제 이들에게 십일조를 1/10으로 말하는 것이 합당한지 우리는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또한, 교회 재정으로 어떻게 교인 중에 가장 빈곤한 자들이나 경제적 위기에 직면한 자들을 직접 돌볼 수 있는지도 그 형식과 방법 면에서 구체적으로 선례를 마련해야 한다.

 

7. 돈만 밝히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껏 돈을 밝히는 교회가 많았다는 사실에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하고, 또 이미 많이 반성하고 있음을 세상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교회 운영을 돈과 무관하게 생각하거나 목회자의 생활이 저절로 유지될 것이라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균형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 목회자는 목회자의 삶이 기본적으로 검소하고 청빈한 삶으로의 부름임을 이해해야 하며, 동시에 교인들은 목회자가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기본 예를 다하고 배우자와 부모로서 부양의 책임을 적절하게 다할 수 있도록 품격에 맞는 최소한의 임금을 지급하도록 나누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코로나19로 많은 미자립 교회의 생존이 위태롭다. 거기에는 가난한 목회자의 생존이, 가난한 교인의 생존이 함께 얽혀 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교회가 지방회와 연회(노회), 교단을 넘나들며 서로 연대하고 서로 지탱해 줄 때이며, 대형 교회 교인들이 지역 교회로 흩어져 갈 때이다.

 

김혜령 / 이화여자대학교 호크마교양대학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졸업,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교 신학 박사(기독교윤리학).

 

 

출처 뉴스앤조이(http://www.newsnjo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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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평촌놈 2020/06/26 [19:17] 수정 | 삭제
  • 우리나라교회 많지요. 그런데 대형교회와큰중간교회 20%로도 안되지요. 대부분 교회 교회인수2백명정도 되는교회 많지요. 대형교회나 심일조와감사헌금 여러헌금이 많지요. 일반교회는 재정이 힘들것 입니다.코로나19로 교회인들 자영업자들 엄청난 타격이 있서지요. 그분들이 돈을벌지 못했기때문에 헌금또한 할수 없서을것 입니다.대형교회도 마찬가지일것 입니다. 교회다리면서 자영업했던분들 너무장사가 안되서 많은사람들이 대출을 했지요. 진정한목사님과진정한교회인들도 많지요. 너무 코로나로 교회쪽을 비방 하는것이 마음이 않좋지요. 저는불교 신자입니다.예전에 8년정도 여의도순복음교회을 다닌적이 있지요.그리고 저의동네백석교회라고 제가초등학교때 다닌적이 있지요. 저의집안이 불교집안 이지요. 예전 직장상사 권유로 8년정도 여의도 순복음교회을 다녔서지요. 그래서 저는 교회도 좋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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