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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 목사]본론,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 이해

[논문] 로마서에 나타난 율법과 복음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김형기기자 | 기사입력 2018/11/17 [14:28]

[김은영 목사]본론,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 이해

[논문] 로마서에 나타난 율법과 복음의 상관성에 대한 연구

김형기기자 | 입력 : 2018/11/17 [14:28]
▲ 울진한빛교회 김은영목사

1. 로마서에서의 율법의 위치
로마서에서 율법은 어느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종교개혁자 루터의 주장처럼 ‘이신 칭의’ 가 로마서의 중심 주제로서 위치하고 있는가? 최근의 학자들 중에는 전통적 시각이 서구인들의 개인주의적 시각에 의해 채색되어 있어, 바울의 구원사적 큰 전망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즉, 바울은 실존주의자 루터처럼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면 용서를 얻을 수 있을까?”하는 개인적인 구원 문제로 씨름하다가 이신 칭의 교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 아니고, 이방인을 어떻게 합법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하는 구원사적 문제와 씨름하였고, 이신 칭의 교리에서 그 해답을 발견했다는 것이다.33)

이러한 생각을 하는 학자들은 로마서 9-11장을 로마서의 중심으로 보고자 제의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로마서가 로마교회의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저술한 서신이기 때문에 로마서 14:1-15:13에 개진된, ‘서로 연합하라’ 는 바울의 권면이 로마서의 중심 목적을 표현한다고 보고 거기서 로마서의 주제를 찾고자 한다.34)

본 논문은 로마서의 저술 목적과 관련하여 로마서에서의 율법의 위치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로마서를 썼을까? 바울이 로마서를 써야만 했던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매우 다양하다. “오늘날 학자들 중에 로마서는 바울이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그리고 독자들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평소에 다른 데서 전했던 복음을 로마교회에게 체계적으로 진술하여 보낸 편지로 보는 식의 나이브한 해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35)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목적을 묻는 질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로마교회 내의 문제 해결 목적이 아닌, 바울 자신의 깊은 내적 충동에 의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 대표자들은 R. A. Lipsius, T. W. Manson, G. Klein, G. Bornkamm, J. Jervell 등이다. 또 다른 하나는 로마서 또한 다른 서신들과 같이 그 교회 안의 문제와의 대화에서 생긴 것이라는 견해이다.36)

이한수, 「로마서 주석」, (서울: 이레서원, 2002), pp. 37-38.이한수, 「로마서 주석」, pp. 38-39. 오성종, “율법과 복음: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의 ‘율법과 복음’ 문제를 위한 예비적 · 주석. 적 고찰” ,「한국신약학회 정기 학술대회」, (2007), p. 46.전경연, 「로마서 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pp. 23-24.

신약성서의 현대적 연구가 시작된 19세기 초에 바우르(F. C. Baur)는 바울의 로마서 저술 목적이 사도 자신의 내적 충동에서 실현된 것이 아니라, 로마교회 자체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즉 로마교회 안에 교인들을 괴롭히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 편지를 쓰게 됐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우르는 전체 서신을 해명해 주는 열쇠를 9-10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진술하였다.37)

왜 사도 바울은 자신과 전혀 무관한 낯선 로마교회를 위하여 가장 긴 편지를 써야만 했는가? 이에 대해 서동수는 그의 논문을 통하여 “신학적인 견해 차이를 보이는 ‘약한 자’(유대인 기독교인)와 ‘강한 자’(이방인 기독교인)로 이루어진 로마공동체가 이미 장소적으로 분리되고, 사상적으로 영구한 분열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우주적 구원사를 이해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 이 두 집단을 다시 하나의 공동체로 연결시켜 보려는 교회 통합과 일치의 차원에서 기록하였다”고 주장한다.38)

롬 14:1-15:13의 본문에서 로마교회는 율법 준수 문제에 대한 신학적 견해 차이로 두 그룹(유대인 신자들, 이방인 신자들) 간에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율법에 매여서 고기를 거부하고 채소만 먹으며 특정한 날만을 거룩한 날로 지키려는 “믿음이 약한 자들”(유대인 신자들)과, 아무 음식이나 가까이 하며 특정의 거룩한 날을 지키는 율법의 관습에 매이지 않는 “강한 자들”(이방인 신자들)은 서로를 비판하고 업신여기면서 불화와 반목 가운데 있음을 본다.39)

결국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동기는 그 당시 로마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유대인과 이방인의 분리, 분열)였으며, 로마교회의 통합과 일치를 목적으로 한 대화의 수단으로 집필하였다고 본다.40)

전경연, 「로마서 신학」, p. 29.서동수, “왜 바울은 로마서를 써야만 했는가?”, 「호서신학」7 (2000), p. 141. 오성종, “율법과 복음: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의 ‘율법과 복음’ 문제를 위한 예비적 · 주석 적 고찰”, p. 48.서동수, “왜 바울은 로마서를 써야만 했는가?”, p. 141.

바울은 율법에 매여 있는 유대인 신자들과 복음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율법과 복음이 하나로 통합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롬 3:31, 10:4), 그들을 대화의 장으로 초대(롬 15:7-8)하고 있다. 바울은 여전히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을 하며 이방인 신자들과 반목하고 있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율법을 중심 위치에 놓고 집중적으로 교훈함으로써, 복음 안에서 자유를 얻고 평화로운 공존의 길을 걷도록 권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은 복음과 함께 로마서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2. 단어 ‘율법(novmo)’의 사용 용례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자신의 ‘복음’을 로마교회에 설명하면서 그 반대 개념인 ‘율법’에 대해서도 많이 언급한다. ‘율법’ (novmo)이라는 단어는 로마서에서 74회나 사용된다. 이는 바울이 사용한 전체 중(총 120회) 61.7%에 해당된다.41)

바울은 율법(novmo)이란 말을 획일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이는 바울이 과감하게 “자유스러운 언어의 유희”42)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서에서도 전체적으로는 모세의 시내산 율법을 가리키지만, 좀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노모스란 용어를 바울은 사용하고 있다. 즉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3:19)에서 바울은 앞의 노모스는 구약성경을, 뒤의 노모스는 모세오경을 의미하는 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3:21)에서도 바울은 앞의 노모스는 모세의 시내산 율법을, 뒤의 노모스는 모세오경을 의미하는 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논쟁이 끊임없는 3:31의 경우도 두 번의 노모스가 모두 (모세의 시내산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3:19에서와 같이 구약성경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가 있다.”43)

로마서에서 바울은 노모스를 첫째로 시내산 율법, 둘째로 모세 오경, 셋째로 구약성경을 의미하는 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더 나아가 바울은 노모스를 ‘원리’, ‘질서’ 또는 ‘법’을 의미하는 용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7:1-3에서 4회 사용된 노모스는 ‘법’ 또는 ‘관습’을 뜻하며, 7:21-8:2에 8회 쓰인 같은 헬라어 단어 역시 ‘법’ 또는 ‘원리’의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할 것이다.”44)

이외에도 바울은 노모스의 용법을 더욱 확대하여 우주적으로 미치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롬 2:14).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어떤 종류건 율법을 가지지 않은 백성들은 없다고 보았다.45) 로마서에서 율법이 미치는 영역은 유대인을 넘어 온 인류에게 미치고 있다. 율법은 제한적이지 않다. 율법은 한계가 없다. 이것이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 이해이다.

조광호,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이해” ,「신약논단」11 (2004), p. 721. 오성종, “율법과 복음: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의 ‘율법과 복음’ 문제를 위한 예비적 · 주석적 고찰”, p. 41.
오성종, “율법과 복음: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의 ‘율법과 복음’ 문제를 위한 예비적 · 주석적 고찰”, p. 41.
오성종, “율법과 복음: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의 ‘율법과 복음’ 문제를 위한 예비적 · 주석적 고찰”, p. 41.
정인찬 편, 「성서대백과 사전」6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0), p. 723.


3. 유대인을 위한 율법

유대인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독특하고 특별한 위치로 부름 받았다. 오직 그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놀라운 특권을 소유하고 누렸다(롬 9:4-5). “하나님은 그들에게 언약을 주셨고 성전의 예배와 율법을 주셨고,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주셨고 족장을 주셨다.”46)

유대인들이 누린 특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율법의 수여받음이다. 로마서 9:4에 “율법을 세우신 것(hJ nomoqesiva), ‘노모데시아’ 는 ‘율법’을 뜻하는 ‘노모스’(novmo) 와 ‘놓다’, ‘두다’, ‘세우다’, ‘만들다’ 등을 뜻하는 ‘티데미(τqημι)’ 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이며, 신약에서는 이곳에서만 발견된다. 원어의 의미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는 ‘입법’, ‘율법의 수여’ 란 의미를 나타낸다.”47) 케제만 또한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노모데시아’는 “율법의 소유와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수여와 관계있다”고 밝히고 있다.48)

W. 바클레이, 정혁조 역,「성서주석 시리즈 로마서」(서울: 기독교문사, 1971), p. 177.제자원 편,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 로마서 9-16」(서울: 제자원, 2001), p. 35.E. 케제만,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 역, 「국제성서주석 · 로마서」,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2). p. 422.

바울의 진술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만든 율법을 수여받아 그 율법을 소유하는 특권을 누렸다. 곧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유대인에게 주어진 것이다(9:31).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율법을 소유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기회가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계시 받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바울은 로마서 2:17-18에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을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라고 하며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이 누리는 세 가지 특권을 제시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특권은 ‘율법을 의지한다’(kai; ejpanapauvh/ novmw/)는 것이다. ‘에파나파우오’(ejpanapaω) 동사는 기본적으로 ‘기대다, 의지하다, 신뢰하다’ 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뜻은 율법에서 자기 존재의 기초와 근거를 두고 거기에 소망을 걸며 만족을 찾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태도를 말한다.49)

두 번째 특권은 ‘하나님을 자랑한다’(kai; kaucasai ejn qew/)는 것이다. ‘자랑한다’(kaucaομαι)는 동사는 신약에서는 배타적으로 대부분 바울 서신에서 나타나고 있다(35회 정도). 율법을 주신 한 분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자랑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특권 중의 하나였다.50)

세 번째 특권은 ‘하나님의 뜻을 안다’(kai; ginwvskei" to; qevlhma)는 것이다. 헬라어 본문은 ‘뜻을 안다’고만 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뜻’(qevlhma)이란 술어를 24회 사용하는데 그 중에 20회 이상을 하나님의 뜻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51) 또한 문맥상으로도 하나님이 주신 율법으로 말미암아 교훈을 받아 그분의 뜻을 안다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는”(2:18b) 특권을 아울러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지극히 선한 것’(ta; diafevronta)은 중요한 것들, 또는 본질적인 것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좋게 여긴다’(dokimavzein)로 번역된 동사는 ‘검토해 보고 좋으면 시인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동사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바른 윤리적 판단을 내릴 때 사용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삶의 정황 속에서 바른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다.52)

이와 같이 유대인들의 삶에 율법은 절대적이다. 그들은 율법을 의지했고 또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했으며,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근본적인 것에 대한 분별력을 소유하게 되었고 바른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가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처럼 율법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매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2:17,23a).”53)

율법의 기본 성격은 율법에서 규정하고 요구하는 것들을 지키고 행해야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을 자랑하던 유대인들은 과연 율법의 요구에 부응하는 행위를 가졌는가? “율법은 행해야 사는 것인데(2:13), 그들은 율법의 요구를 지키지 못하고, 죄를 지었으므로 율법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2:12b). 즉 바울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구원에 이르려 했으나 그들의 이 같은 시도는 실패하였다(9:31)”는 것이다.54)

이한수, 「로마서 주석」, p. 230.이한수, 「로마서 주석」, p. 231.이한수, 「로마서 주석」, p. 231. 이한수, 「로마서 주석」, pp. 232-233.조광호,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이해”, p. 726.조광호,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이해”, p. 726.

바울은 로마서 2:23에서 유대인을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이는 곧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지적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의 빛으로, 열방의 제사장 나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이 이방의 빛이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필요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온 세계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출 19:5-6). 그러나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들인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율법을 자랑하였으나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명예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율법을 위반하는 자가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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