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黙想없는 신앙생활은 죽은 겁니다.

홍천뉴스투데이 | 기사입력 2018/08/28 [19:38]

黙想없는 신앙생활은 죽은 겁니다.

홍천뉴스투데이 | 입력 : 2018/08/28 [19:38]
자신을 탁월한 사냥꾼이라는 긍지로 살아가는 이가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숲속에 들어갔을 때, 바로 눈앞에 거대한 독수리 한 마리가 나무에 앉아 있었다. 반사적으로 그는 활에 화살을 장착하여 독수리를 겨누었다. 그런데 그가 독수리를 향해 화살을 겨누면서 자세히 보니 독수리는 자신이 죽게 된 위기의 순간인줄도 모르고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냥꾼은 자기도 모르게 독수리의 눈길을 따라 그곳을 보았더니 독수리는 큰 뱀 한 마리를 잡기위해 노려보고 있었다.    

사냥꾼이 그 뱀을 쳐다보았더니 뱀도 역시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뱀은 꼼짝도 하지 않고 큰 개구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개구리도 뭔가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색상이 화려한 큰 무당벌레를 잡아먹기 위해 노려보는 것이었다. 그 무당벌레 역시 뭔가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앞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진딧물을 잡아먹기 위하여 노려보는 중이었다. 독수리에서 뱀으로, 개구리에서 무당벌레로, 진딧물까지 바라보다가 그 사냥꾼은 슬그머니 들고 있던 활과 화살을 내리면서 뒤를 돌아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 뒤에도 누군가가 나를 노려보고 있지는 않는가?”    

이 땅에 생존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죽음이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이란 오늘 아침 내가 나섰던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를 못하는 것이다. 누구나 아침에 집을 나서며 저녁이면 당연히 집으로 귀가(歸家)하리라 믿으며 집을 나선다. 그러나 모두가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아침에도, 출근, 혹은 외출한 세계 60억의 인구 중에 수십만 명은 밤이 되어도 집에 귀가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낮 동안에 객사(客死)한 것이다. 같은 논리로, 오늘밤 무사히 집에 들어왔으나 내일 아침에 자신의 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밤사이에 자다가 떠났기 때문이다. 이것이 죽음이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이들은 오늘하루도 자신의 생활공간에서 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대한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이가 이 땅에서 만나는 마지막의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일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신앙인답지 않은 온갖 패악으로 대한 후에, 이 세상을 떠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두려운 것이 아닌가?    

성도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하는가?   

한마디로 죽음이란 작별인사를 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다.
지금도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크리스천들 중에 자칭 믿음이 좋다는 사람일수록 자기죽음에 대한 막연한 잘못된 환상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이 땅을 떠나는 날에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평생 좋아하던 말씀을 읽고, 좋아하던 찬송가를 함께 부른 후에 감사기도와 함께 작별의 인사를 할 줄로 아는 환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확률적으로 현실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환상이다. 이러한 모습으로 이 땅을 떠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백 명이면 한 두 명이 있을 정도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이 땅을 떠나는가?
많은 이들이 ‘자고 일어나보니 돌아가셨더라.’ 는 식으로 떠난다. 사고로 인해 비명횡사(非命橫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어떤 이는 의식도 없이 병원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다가 임종(臨終)을 맞는다. 또 다른 이는 사지는 멀쩡해도 치매(癡呆)로 인하여 바른 정신과는 거리가 먼 상태에서 자신의 일생을 마감한다. 이것이 죽음의 실상이다. 자기는 의식이 있을 때 자녀들에게 미리신앙적인 유언장을 써두겠다고 자랑이 아닌 자랑을 하는 이도 있지만, 어느 날 그가 떠난 후에 제대로 기록해 보관한 유언장 본적이 없다.   

그러하기에 자기주위에 이처럼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알고 인식하는 이들은 이 땅에서 자신이 대하는 상대가 누구이든지 함부로 “경거망동”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내 입에서 나오는 생각과 말들이 실은 나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기는 인식과 작별 인사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재철, 회복의 신앙 P.190에서 재인용).    

오늘 우리교단의 슬픈 자화상    

오늘 아침 “생명의 샘, Q. T” 묵상에세이 김 동호 목사의 글에 ...
어느 교회 집사님 한분이 세상을 떠나셨다. 그 집사님은 의사였는데, 동네사람들에게까지 존경을 받는 분이었기에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왔다. 그런데 상주되는 아들이 목사에게 요청하기를 자기아버지의 교회직분을 장로(長老)로 해 주실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할 때 교회직분이 집사인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든 모양이다. 담임목사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그가 목사에게 했다는 말이, “경찰이나 군인이 공을 세우고 죽으면 1계급 특진 같은 추서가 있는데, 교회에는 왜 그런 제도가 없습니까?” 교회 직분을 계급으로 인식한 극단적인 예라고 할 수가 있다.   

오늘 우리교단의 일부 성직자라는 이들은 교회가 “잘못 살아있는 것이 차라리 잘 죽어 있는 것보다도 더 위험하다” 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잘못된 지도자상에 오염되지 말고 ‘섬기는 리더’가 되라고 명령하시지만 그 말씀을 귀와 마음에 담아 가슴으로 일하는 섬기는 리더(Servant Leadeer)를 볼 수가 없다. 지금 우리교단에 필요한 것은 온갖 꼼수에 능통한 ‘군림하려는 보스’가 아니라, ‘섬기는 리더’, ‘희생하는 리더’, ‘십자가를 지는 리더’, ‘피 흘리는 리더’ 가 필요하다.    

평생을 복음사역을 마치고, 이제는 죽을 자리를 찾아 로마를 향하던 사도 바울께서 에베소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부탁한 말씀은 성직자라면 누구나 심비에 새겨야할 일이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20장28절). 지금도 많은 이들의 염려에는 눈을 감고 오로지 그 자리에 머물기 위해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모습이 한없이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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