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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붓끝으로 호흡한 500년, 홍천의 정신사(精神史)를 다시 쓰다

소산(素山) 김규영, 19권의 필사본으로 흩어진 홍천 기록 집대성
범파정 시문 통해 '남당 한원진' 등 유학 거두들의 숨결 복원

용석준 기자 | 기사입력 2026/04/17 [18:39]

[기획] 붓끝으로 호흡한 500년, 홍천의 정신사(精神史)를 다시 쓰다

소산(素山) 김규영, 19권의 필사본으로 흩어진 홍천 기록 집대성
범파정 시문 통해 '남당 한원진' 등 유학 거두들의 숨결 복원

용석준 기자 | 입력 : 2026/04/17 [18:39]

한 지역의 역사는 기록의 파편이 모여 비로소 하나의 생명체로 완성된다. 소산 김규영 서예가의 이번 성취는 규장각과 국립도서관, 심지어 해외에 고립되어 있던 홍천의 '역사적 유전자(DNA)'를 고향의 품으로 생환시킨 일대 사건이다. 특히 해서체(楷書體)라는 가장 정직한 서체로 기록된 이 19권의 사료는, 디지털이 흉내 낼 수 없는 육필의 엄정함과 향토애가 결합된 '21세기형 신(新) 향토지'라 명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소산 김규영 서예가의 필사본 19권

 

홍천군 남면 수태극의 정기를 품은 남노일리 출신 소산(素山) 김규영 서예가(70)가 붓끝으로 홍천의 500년 잠든 역사를 깨워 일으켰다.

 

1454년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부터 1941년 강원도가 발간한 『강원도지』에 이르기까지, 옛 문헌 속에 흩어져 있던 홍천의 기록들이 김 서예가의 1년 2개월에 걸친 고단한 수행 끝에 총 19권의 필사본으로 재탄생했다. 그가 정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관동지』, 『홍천읍지』, 『화산현지』 등은 그간 규장각과 일본 나카노시마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지역민들이 접하기 어려웠던 ‘홍천 밖의 홍천’ 기록들이기에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

 

김 서예가는 매일 5시간씩, 사방 1㎝ 남짓한 세필 해서체에 온 신경을 쏟았다. 10여 자루의 붓이 닳아 없어지는 동안 "태어나서 밥값은 하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치열한 작가 정신이 칠순의 서예가를 지탱했다.

 

특히 이번 작업의 백미는 홍천강의 랜드마크이자 조선 선비들의 문학적 성지였던 ‘범파정(泛波亭)’의 정신적 복원이다. 김 서예가는 범파정과 관련된 50여 편의 한시를 별도로 필사하며, 과거 홍천이 누렸던 높은 인문학적 위상을 증명해 냈다.

 

그가 필사한 시문 중에는 기호유학의 거두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차범파정벽상운(次泛波亭壁上韻)」 등 당대 최고 지성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한원진이 범파정의 난간에 기대어 읊었던 "세속의 먼지 속에서 근심에 쫓기다 신선의 땅에서 한가로움을 얻는다"는 고백은, 범파정이 단순한 정자가 아니라 성리학적 수양과 존재 성찰의 공간이었음을 말해준다.

 

김 서예가는 “50편의 한시를 옮기는 내내 범파정의 빼어난 절경이 눈앞에 선했다”며 “언젠가 복원될 범파정 현장에 이 시들이 새겨진 표지석이 세워져 홍천의 인문 정신을 기리길 바란다”고 소회를 밝혔다.

 

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작가이자 홍천문화원이사로, 홍천학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며 평생 고향의 미학을 탐구해 온 김 서예가는 이번 필사본 원본을 적절한 시기에 전시하고 홍천군에 기증할 계획이다.

 

사학계에서는 이번 필사본 완성이 지역 향토사 연구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흩어진 기록을 한데 모은 것은 물론, 서예라는 예술적 형식을 빌려 역사를 박제된 유물이 아닌 ‘살아있는 문화적 실체’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김 서예가의 붓길은 이제 홍천의 미래 세대가 고향의 자긍심을 찾아가는 길잡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소산 김규영 서예가


기록의 보존, 홍천의 역사를 깨우는 생명력

 

소산 김규영 서예가가 일구어낸 고된 여정은 가히 ‘인문학적 고고학’의 정수라 평가될 만하다. 차디찬 땅속에 묻힌 유물을 발굴하듯, 억겁의 시간 속에 잠들어 있던 문헌의 파편들을 길어 올려 정갈한 해서체(楷書體)로 생명력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필사로 복원해 낸 범파정(泛波亭)의 시문들은 홍천이 단순한 지리적 변방이 아니었음을 학술적으로 증명한다. 범파정은 조선의 지성들이 대자연의 섭리를 통해 도(道)를 체득하고 인간의 본성을 성찰했던 ‘사유와 철학의 거점’이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이번에 완성된 19권의 필사본은 향후 ‘홍천학(洪川學)’의 체계를 세울 고귀한 학술적 초석이 될 전망이다. 이제는 지역 사회가 응답할 차례다. 행정 당국 차원의 체계적인 보존 대책 마련은 물론, 현대적 가치를 더하는 디지털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선생이 닳아 없앤 열 자루 붓의 노고와 숭고한 향토애에 대해, 홍천 사회가 전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하고도 품격 있는 헌사(獻辭)가 될 것이다.

 

용석준 기자 

홍천뉴스투데이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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