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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호 칼럼] 고통은 잘못된 것을 고치라는 시그널이다.

쾌락을 원하십니까? 안 아프기를 원하십니까?

용석준 기자 | 기사입력 2022/11/30 [20:27]

[윤영호 칼럼] 고통은 잘못된 것을 고치라는 시그널이다.

쾌락을 원하십니까? 안 아프기를 원하십니까?

용석준 기자 | 입력 : 2022/11/30 [20:27]



이 땅에서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현실적이 두 축이 있다면 다름아닌 행복(樂)과 고통(苦)일 것이다. 누구나 행복은 좋아하고 고통은 싫어한다. 왜 그러느냐고 따질 수 없다. 락(樂)이 좋고 고통이 나쁘다는 것은 그걸 그냥 느끼는 것이지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천국도 행복하기 위해서 추구하는 것이고 지옥도 고통스럽지 않기 위해서 기피하는 것 아닌가? 그러기에 행복은 최후의 목적이지 그 다른 무엇의 수단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즐거움이 지속되면 점차 그 느낌이 줄어들어 행복한 줄 모르게 되지만 고통은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삶에서 쾌락보다 더 심각하게 작용하는 것이 고통이다. 오죽하면 자살하는 사람이 고통보다 죽음을 택하겠는가?

 

비싼 음식은 못 먹어도 살지만 아픈 것은 견딜 수 없다. 예쁜 옷은 안 입어도 살지만 추운 것은 견딜 수 없다. 조금 가난한 것은 견디겠지만 억울한 것은 참기 어렵다. 그러기 때문에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고통을 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기에 일찍이 고타마 싯타르타가 인간 삶에 있어서 고통을 가장 중요한 아젠다로 삼아 그것의 발생원인과 소멸과정을 분석했다고 하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종교차원을 떠나서 위대한 선각자라 아니할 수 없다.

 

옛날에는 태풍이나 홍수 등 자연이 인간을 고통스럽게 했다. 거대한 자연의 힘을 막을 길 없는 약한 인간은 샤머니즘적인 주술을 통해 마음을 위로 받고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려 했다. 지금은 더 확실하게 발전된 과학기술이 그 주술의 기능을 대체하여 왔기에 자연이 주는 고통은 예전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인간의 고통이 그만큼 없어졌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자연이 주는 고통이 줄어든 이상으로 인간이 주는 고통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과학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나 홀로 살수 없는 세상이 되었기에 사람과 세상이 주는 고통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실존 문제가 되어버렸다. 그러면 고통은 전혀 무익한 것인가? 니체는 그렇게 봤을 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고통은 잘못된 것을 고치라는 시그널이다.

 

병이 났을 때 안 아프면 병원 안 간다. 그래서 죽게 된다. 암이 무서운 것은 평소에 안 아파서 죽게 될 때까지 방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고통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이 주는 고통에 초점을 맞춰본다.

 

오늘날 인간이 겪는 고통의 4/5는 다른 사람이 가하는 고통이라고 C.S루이스는 지적하고 있다. 고통의 진원지가 인간관계라는 것이다. 남에게 고통을 주면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심과 경쟁심이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기에 자연이 가하는 고통보다 인간이 주는 고통이 훨씬 더 억울하다. 불평등과 불공정, 혹은 공정한 제도일지라도 불공정한 집행으로 인해 가해지는 억울함과 박탈감의 고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힘있는 자가 이해될 수 없을 정도로 단기간에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다. 강자가 불법과 편법을 저지르고도 떳떳할 수 있다는 것은 정의가 파괴되었다는 증거다. 정의가 파괴되면 반드시 억울한 사람이 생긴다. 억울한 사람은 반드시 고통을 느낀다. 고통의 몫은 결국 약자 몫이다.

 

지금 힘없는 많은 사람들이 애매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어떤 시그널로 알아차려야 할까? 병이 치료를 요하듯이 사회적 병리현상도 속히 고쳐야 한다는 알림이다. 의미가 발견되지 않는 아픔은 쓸데없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윤영호 칼럼니스트(시인, 수필가, 홍천군지속가능발전협의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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