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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샘의 홍천문화 탐방 36. 수타사(壽陀寺) - 원통보전(圓通寶殿) 이야기

김동성 기자 | 기사입력 2022/09/28 [04:09]

김샘의 홍천문화 탐방 36. 수타사(壽陀寺) - 원통보전(圓通寶殿) 이야기

김동성 기자 | 입력 : 2022/09/28 [04:09]

 

 [수타사 원통보전]

 

원통보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그 사찰의 본전일 때 붙이는 이름이고, 사찰 내의 일개 전각일 때는 관음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지금의 원통보전은 1992년에 새로 지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에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화려한 건물이다.

 

 [원통보전 관세음보살상]

 

원통보전(圓通寶殿)의 관세음보살상은 2015년 6월 27일 개금불사(改金佛事 : 부처님의 몸에 금칠을 다시 하는 의식)를 하기 전 복장(服藏 : 불상을 만들 때 그 안에 사리와 불경 등을 넣는 일) 조사를 했는데, 이때 조성발원문 1점을 비롯해 후령통(喉鈴筒 : 후령이란 부처님의 원음(圓音) 즉 설법을 상징한다. 뚜껑에 대롱을 달고 통 안에는 다섯 개의 병(五寶甁)을 넣어 오방(五方)을 상징하는 오색 천과 오보(五寶), 오곡(五穀), 오향(五香) 등을 넣게 된다.) 1점, 주서(朱書) 다라니 18점, 복장 안을 메우는 빈 백지 4점 등이 발견되었다.

 [원통보전 목조관음보살좌상]

 

관세음보살상의 보관(寶冠)과 두 손은 따로 만들어졌고 나무로 만든 보관의 세부 장식은 금속재를 사용했다. 보관 중앙에는 관세음보살의 스승인 아미타불이 작게 표현되어 있으며, 특이하게도 화불(化佛) 아미타불인데 조선시대에 유행한 두 손을 가슴 높이로 들어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비로자나불의 지권인(智拳印 : 왼손 집게손가락을 세우고, 오른손으로 그 첫째 마디를 쥐고 있는 것)을 하고 있다. 18세기에 조성된 수타사 관세음보살상은 17세기 보살상에 비해 얼굴이 차지하는 비율이 커졌고 어깨와 무릎 폭은 좁아졌다. 얼굴은 타원형에서 네모난 형태로 바뀌었고, 미소를 머금어 입가에 힘을 준 표정은 17세기 보살상의 특징을 계승한 것이다.

 

상투를 튼 관세음보살상의 머리칼은 귀 앞으로 흘러내려 어깨에까지 닿고 있다.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은 ‘관음대사(觀音大士)’ 또는 두루 통하지 않는 바가 없다고 해서 ‘원통대사(圓通大士)’라고도 한다. 이런 연유로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을 ‘관음전’ 또는 ‘원통보전’이라 한다.

 

명나라 때 사람인 사조제가 지은 수필집인 <오잡조>에는 관음보살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관음대사는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어 온갖 방편으로 세상을 제도하니 이 또한 공자 이후의 맹자와 같다. 관음대사가 세상에 나타난 모습은 여러 가지인데 지금 여인상으로 만드는 것은 잘못이다. 기왕 ‘대사’라 했으니 어찌 여인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흔히 여성 불교신자를 ‘보살’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특히 관세음보살은 여성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는데, 옛날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수타사 관세음보살상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가로 255.3cm, 세로 12.0cm 크기의 조성발원문에서 찾을 수 있다.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한 간절한 목적은 ‘이 보살상을 조성한 공덕으로 모든 중생이 극락의 연지에 왕생해 무량광불을 만나기를 바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누구나 두려워하는 사후 세계가 아니라 아미타불이 계신 극락의 연지에서 한없는 광명을 상징하는 아미타불의 또다른 이름인 무량광불을 만날 것을 기약하고 있다.

 

[관음보살상 복장유물] 

 

1758년 5월 수타사 옥수암에서는 관세음보살상 점안식이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이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는데 조성을 주도했던 증명을 비롯한 조각승과 화주 등 소임을 맡았던 스님은 13명이었고, 옥수암에는 10명의 스님이, 수타사에는 84명의 스님들이 수행하고 있었다. 이 기록을 통해 100여명의 스님이 옥수암과 수타사에 머물 정도로 사찰의 규모가 현재보다 컸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시주자는 스님들과 일반인들로 모두 252명이 참여했고 46cm의 중소형 관세음보살 조성에 모두 359명이 동참했다. 이를 통해 1758년 수타사 옥수암 관세음보살 조성 당시 이 지역 사람들의 지극한 염원이 담겨있는 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시주자 가운데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새로운 불사 주체로 거사(居士)와 사당(舍堂)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인물들로 불전을 건축하거나 불상과 불화를 조성하는데 적극적으로 시주에 동참한 이들이다.

 

수타사 관세음보살상 복장물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후령통을 싼 겉종이이다. 증명을 맡은 스님이 조성 발원문에는 ‘증명 선교대선사 찬연(證明 禪敎大禪師 粲淵)’으로 기록되어 있고, 후령통을 싼 겉종이에는 붉은 글씨로 ‘증명 신 찬연(證明 臣 粲淵)’으로 쓰여져 있다. 18세기 이후에는 1736년에 조성한 제천 강천사 대세지보살상 복장물에서도 보듯이 불사를 증명하고 있는 스님을 ‘신(臣)’으로 표기한 것이 많은데, 이는 당시 유교의 풍습이 불교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대적광전 적멸궁에서 나왔다는 석가모니 진신사리 1과와 원통보전 관세음보살 복장에서 발견되었다는 석가모니 진신사리 3과] 

 

주불단 바로 옆에는 대적광전 적멸궁에서 나왔다는 석가모니 진신사리 1과와 원통보전 관세음보살 복장에서 발견되었다는 석가모니 진신사리 3과가 전시되어 있다.

 

※ 홍천문화재 탐방은 필자가 2021년 홍천문화원에서 운영하는 마을관광해설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역사적 사실, 강의에서 논의되었던 내용, 현장답사를 하면서 남겼던 기록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혹시 왜곡되었거나 잘 못 알고 기록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수정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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